7 1/2 프로젝트는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하는 어떤 지점을 향한다. 그렇다고 그 지점이 명확한 두 지점의 평균을 지시하는 것도, 혹은 그 사이의 모호한 지점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존말코비치 되기>에서 차용한 이 이름은 7층과 8층의 사이 공간을 지시한다. 7층과 8층 사이에 소수점의 층수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엘리베이터가 두 층 사이에서 멈추게 되면 비상버튼을 눌러 구조를 요청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큐레이터 오선영의 프로젝트는 의도적으로 이 고장의 지점을 향한다. 망가진 것은 질서의 밖(out of order)이라는 영역에 위치한다. 7 1/2은 스스로 두 층 사이에서 멈추고, 다시 스스로를 향하여 구조를 요청하는 셈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자신이고, 그 문제 속에서 해결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도 자신이다.
정상적인 것들 사이에, 그러나 정상적인 것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또 다른 세계로의 통로로서의 이 ‘사이’의 공간을 주장하는 것 이것이 7 1/2프로젝트이다. 정수의 자리, 7층 그리고 8층은 우리가 그 안에 있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강요받는 현실 그 자체이다. 정수의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현실의 세계, 즉 자본주의의 세계이다. “자본주의 사회 그 안에서 예술을 하는 행위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7 1/2 프로젝트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하여 조금 다른 방식으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 그 안에서가 아니라 혹은 그 밖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는 그 모든 것들의 ‘사이’에서 예술을 하는 행위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닐 수 있을까? 소위 제도권이라는 것 안에서 예술을 기획하고 제도의 안에서 예술행위를 수행하는 것, 혹은 ‘독립’되어 그 ‘밖’을 주장하는 이 양가성이 아니라, ‘사이’라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7 1/2프로젝트의 질문이다. 그러므로 7 1/2의 질문은 다분히 공간을 매개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1/2이라는 ‘사이’의 공간을 찾는 시도이다. 사이는 경계이고, 틈이며, 주름이며 표면인 공간이다.
2014년 처음으로 71/2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그것은 우선 ‘사이’라는 공간적 개념을 위한 ‘담론’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김남수의 연속 강연 <예술과 무의식의 인류학적 탐사>는 매번 공간을 달리하는 유목적 강연이었다. 김남수는 예술과 현실이 아니라 예술과 무의식을 관계 맺는다. 예술이 직접적이고 총체적인 담론으로 감쌀 수 있는 영역이 아닌 지점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점에서 길 없이 다른 한 점으로의 불연속으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2015년 <기능적 불협화음>을 진행한 문래동으로의 7 1/2의 진입은 그 자체가 불협화음을 발생시켰다. 문래동의 기존 철공소와 새로 이 지역으로 스며드는 예술가들 사이에는 불협의 화음이 발생한다. 불협화음의 발생의 조건을 설정하는 것, 그것이 ‘기능적인 불협화음’이다. 이질성을 조장하는 산책이 바로 불협화음의 발생의 조건을 설정하는 행위이다. 지역을 지켜온 문래동 철공소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삶과 노동의 공간을 구경거리로 만들고 있는 낯선 방문자들과 충돌한다. 동일자와 타자가 충돌한다. 7 1/2은 스스로에게 문래동의 ‘타자’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예술이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관찰하고자 할 때, 삶은 예술의 존재 근거 자체를 의문시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둘은 충돌한다.
‘문래동’은 ‘존 말코비치’가 되기 위한 7과 1/2의 층이며 앨리스의 토끼 굴 속 이상한 세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둘의 충돌은 하나의 ‘극’이 된다. 거리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극은 조직된 산책을 극 속으로 끌어들인다. 현실 속에서 전직 문화예술위원장인 예술가와 철공소 사장, 그리고 영상 속에서 산책가이며 관찰자의 역할과 생활자이며 반대자 역할이 중첩되며 충돌한다. 그들은 현실과 현실, 그리고 역할과 역할 사이의 틈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하고 해체한다.
문래동은 다시 2016년에는 종로3가로 이어진다. 송복은 장학재단의 한켠, 그리고 그 주변의 공간들 속으로 7 1/2은 이주한다. 기계류를 파는 도심의 한 지역의 한옥은 철공소가 떠나가고 공동화된 문래동과는 또 다른 풍경을 지닌 공간이다. <암호적 상상>은 일상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게 하는 상상력이다. 일상적 기호들의 암호화는 일상적 언어의 자모관계, 기표, 기의관계를 재배치하는 과정을 통해 구현된다. ‘성찬경+성기완’ 전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작고한 시인 성찬경이 생전에 ‘물질고아원’이란 이름으로 수집한 폐품들로 만든 오브제들이 그의 일자시와 함께 종로3가의 미로 같은 골목길 속에 전시되고, 다시 시인이자 뮤지션인 그의 아들 성기완이 그의 시를 변형하여 사운드 믹싱을 시도한다. 폐품, 예술소품, 도시 공간, 일자 시, 낭송 사운드 등등 이 전시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들이 자음모음에 대응하면서 기호를 구성한다. 암호적 상상력의 발현은 이 자모를 읽는 것, 이 자모로 구성된 기호를 발성하는 것이다. 발성하는 행위는 기호의 의미를 해독하는 행위와는 구분된다. 7 1/2은 이 발성의 행위를 ‘감각’이라 부른다. 발성은 관객의 것이다.
2017년에 문래동, 종로 3가는 다시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을 얻는다. <두 도시 이야기: 기억의 서사적 아카이브>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 서울과 자카르타는 기호의 변별적 자질로서 음소적 차이를 갖는 동시에,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미론적으로 유사한 기호로 작동한다. 우리에게 타자로 존재하는 인도네시아이지만,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고, 독립이후 전쟁을 겪었으며, 이후 군사 독재 정치, 산업화, 민주화, 경제위기 등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거의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도네시아의 결합으로서의 기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타자를 내 안으로 끌어와야 한다. 타자를 타자로 머물게 하는 것은 망각이며, 타자를 내 안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는 기억 속에서 기호들을 복원해야 한다. 다시한번 인도네시아와 한국이 각각 자음과 모음을 이루어 기호를 구성한다. 기억의 아카이브는 한국이름 해용 혹은 해영, 일본이름 에이타로 히라츠, 그리고 인도네시아 이름 후융을 단 하나의 기호로 묶어내며, 이 이름들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몸을 제시한다. 이 몸은 여러 이름들을 가로지른 단 한명의 개인의 신체가 아니다. 그 몸은 타자를 자기 안으로 끌어안는 불특정화된 몸이다.
2018년 7 1/2은 다시 김해로 이동한다. 불특정화된 몸은 스스로를 이주민이라 규정한다. 유목민처럼 이 타자는 이동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1/2의 공간을 찾아 유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