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기, 나는…… 누구인가?

금년 3월 나는 7 1/2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오선영 큐레이터의 초대로 그 프로젝트의 개막 행사(「기능적인 불협화음」)에 참여했고, 그것에 대한 리뷰를 썼다. 그리고 약 7개월이 지나 2015년 10월 31일 그 프로젝트의 다섯 번째 프로그램인 「여기, 나는 누구인가?」를 지켜보았다. 보다 정확히 말해 거기에 ‘동참했다’. 내가 거기서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나의 역할은 지금 이렇게 그것에 대한 리뷰를 쓰고 있는 일뿐이다), 7 1/2 프로젝트 전체가 묘한 특이한 방식으로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들을 거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7 1/2이 관객들에게 강한 흥미를 유발시켜서 그들을 거기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 7 1/2 자체가, 현실과 예술의 경계가, ‘나’의 일상과 한 작품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나아가 철폐되는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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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점은 첫 번째로 7 1/2에 주어진 물리적 공간이다. 이 프로젝트는 일상의 현실과 분리된, 우리를 현실의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독립된 예술 공간인 어느 전시장이나 미술관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7 1/2 프로젝트의 관객들은 거기서 펼쳐지는 전시나 영화나 공연을 보기 위해서 먼저 예술적 잉여를 전혀, 적어도 거의 남겨두지 않는, 일상‧생활‧노동의 장소일 뿐인 문래동 철공소 거리를 지나쳐 가야만 한다. 또한 ‘토끼굴’이라고 명명된, 낡고 허름하다 못해 반쯤 무너져 내린 것처럼 보이는 그 거리의—특징 없고 반(反)예술적인—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는 7 1/2을 ‘관람'(‘관람’이라는 표현은 분명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하기 전에 아마도 일상과 현실(돈 걱정?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불안감? 사회 현실에 대한 절망? 고독과 고립?) 가운데 놓여 있어야만 했고, 현실이 강요하는 일상적 생활의 리듬감에 어쩔 수 없이 붙들려 있어야만 했다. 그는 숨쉬고 있는 한 현실과 일상에 ‘참여’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가 문래동 철공소 거리를 걸으면서, 삭막한 그 ‘토끼굴’로 들어오면서, 나아가 7 1/2의 여러 가지 것들이 눈앞에 펼쳐지는데도 여전히 현실의 한복판에 붙박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예술’로 규정되는 어떤 것이 눈앞에 지나가는데도, 그것이 또한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도, 그것에 대한 ‘참여’와 일상‧현실에 대한 참여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이다.

그 구별 불가능성의 두 번째 이유는, 7 1/2이 제공하는 작품의 존재 상태에 근거한다. 그 작품은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관점이 개입되어 있을 뿐이지 현실 자체이고(7 1/2의 개막작 「기능적인 불협화음」 또는 이번 7 1/2 다섯 번째 프로그램의 「여기 나는……」), 어떤 경우에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 허구이지만, 그러한 한에서 역설적으로 현실의 한복판을 가리키는 일종의 ‘다큐멘터리’로 변형된다(7 1/2의 다섯 번째 프로그램의 제목 ‘여기, 나는 누구인가?’를 공유하는 김숙현 감독의 단편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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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 열렸던 「기능적인 불협화음」은 예술가들과 예술 관계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이 예술과는 무관했고, 여전히 무관할 수밖에 없는 문래동 철공소 거리를 ‘투어’하면서 우연에 따라 남긴 모습들, 행동들과 해프닝들을 무대화한 것이다. 「기능적인 불협화음」의 상황은 어떠한 예술적 조작도 거의 가미되지 않고, 어떠한 예술적 허구도 개입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 현실 자체의 한 단면이다. 말하자면 어떠한 형태로든 예술이라는 제도나 작업이나 자의식에 안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 예술이라는 보호막이 찢겨져나간 상태에서, 철공소 거리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생경하고 에누리 없는 노동의 현장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7개월 후 오선영 큐레이터의 연출로 ‘공연되었던'(사실은 「기능적인 불협화음」과 마찬가지로 공연이 아니다) 「여기, 나는……」은 다름 아니라 현직 연극배우들과 어느 철공소 사장이 소주잔을 앞에 두고 나누었던 몸짓들과 대화들을 그대로 무대화한 것이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곤궁한 상태와 거기서 비롯된 연극 작업에서의 갈등에 대해 토로하고, 철공소 사장은 철공소를 운영하게 된 내력과 현재의 사업 상황 그리고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남자 배우 류성국은 “나는 지금 27살이고요, 돈이 없어서 고시원에 계속 살다가 지금은 여자 친구 집에 머무르고 있어요. 나쁘게 말하면 얹혀사는 거죠. 좋게 말하면 동거이고요”라고 밝히는데, 이러한 말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빈부격차, 청년 실업, 어쨌든 경제적 요인 때문에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어려운 상황)의 막다른 골목과 마주하게 하며, 그 막힌 장소에서 우리는 한 예술가의 삶이 철공소 노동자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보다 더 절박하고 더 격렬한 투쟁이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더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또한 「기능적인 불협화음」과 「여기, 나는……」은 모두 그러한 현실에 부딪힌 예술 자체의 한계 지점을 가리키며, 예술적인 그 모든 것을 최소화하거나 나아가 무화(無化) 시킴으로써, 현재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간 깊은 상처를 우리 눈앞에 벌려놓는다. 어떤 경우 예술은 그 자체를 망각함으로써만, 그 자체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예술적 허구와 환상을 스스로 차단함으로써만 우리의 등을 현실 한복판으로 떠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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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숙현 감독의 단편영화 「여기, 나는 누구인가?」 역시 다른 방법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날것의 현실을 들추어낸다. 「기능적인 불협화음」과 「여기, 나는……」은 전적인 재현(再現, 현실의 한 상황을 그대로 작품에 가져다놓는 재현, 모든 허구적 요소와 조작을 의도적으로 배격하는 재현)을 통해 우리를 현실의 중심으로 이끌었다면, 「여기, 나는 누구인가?」는 재현을 무시하는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방법을 통해 그렇게 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인 「여기, 나는 누구인가?」의 경우 앨리스와 같은 한 소녀의 시선‧관점과 나레이션에 따라 전개되며, 곳곳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연관된 만화 영상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에 따라 우리는 이 작품을 한 어린아이 안에 자리 잡은 허구적(‘초현실주의적’) 동화로 읽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녀의 시선에 포착된 어른들은 하는 일들도 관심사들도 제각각이고, 각자 자신의 내면의 공간에 빠져 고립되어 있다. 그러나 소녀의 눈에 그들의 모든 관념(내면)의 공간은 무시되고, 남는 것은 소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한’, 기이하지만 웃긴 그들의 온갖 행동과 몸짓뿐이다. 소녀의 눈은 그들 각자의 내면적 공간과 언어는 비껴나가고, 다만 때로는 돌발적이고 때로는 절박해 보이지만 결국 표피적(외면적)인 그들의 각종 동작만 주시할 뿐이다. 또 하나의 앨리스인 이 소녀에게 어른들은, 이 소녀가 그들을 경멸해서가 전혀 아니고 다만 이해할 수 없기에 ‘이상한’ 존재들로, 다만 관념과 언어를 초과하는 ‘몸의 존재들’로 축소된다. 소녀에게 그들 각자가 빠져 있는 고립된 공간은 이해 불가능할뿐더러 전혀 중요하지 않고, 따라서 그들의 고립 자체도 무의미하다. 소녀는 오직 그들이 몸으로 표현하는 것들만을, 그 ‘몸의 존재들’의 표출만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소녀는, 그 어린 눈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리얼리티를, 그 실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사실상 어른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의 내면의 고유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 각자의 고립은 바로 이 시대의 전체성이 거대한 힘을 행사한 결과이자 최종 표식일 뿐이다. 이 시대에 극점에 이른 자본주의가, 우리가 흔히 말하듯, 일종의 전체주의라면, 그것은 과거의 모든 전체주의와는 다르게 개인들 각각을 고립 속에 추방시킴으로써만 유지되고 작동되지 않는가? 사실 오직 그들의 발작적인 몸짓들만이, 이 시대와 그들이 놓여 있는 사회가 불가능한 삶의 불모의 시공간이라는 사실을 그 밑바닥에서 보여주고 폭로한다. 소녀가 실상을 본 것이다. 그 몸짓들만이, 몸들의 그 탄식과 절규만이 ‘지금 여기’에 정직하게 대응하는 ‘사실주의’를 현시시키며, 그에 따라 그들의 절망적인 우울한 동화는, 그 몸들의 우스꽝스럽지만 암울한 카니발은 ‘지금 여기’의 실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다큐멘터리’로 변형된다.

 

박준상 (숭실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