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출발하여 화순 읍내를 거쳐 천인천탑의 운주사 앞을 지나니, 논과 밭, 산들이 점점 많아진다. 작은 하천의 다리를 건너니 커다란 나무들에 숨겨져 있는 폐교, 그의 작업실이 드러났다. 학교를 지키는 듯한 커다란 나무 두 그루와 함께 사람만 한 큰 개 두 마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작가가 이곳을 작업장으로 마음에 품은 이유도 저 큰 나무들 때문이라고 했다. 귀신 나올 듯이 풀로 뒤덮이고 망가진 학교를 작가 손으로 운동장 풀을 정리하고, 교실들을 정리하여 작업실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직접, 작은 집을 손수 지었다. 올해 안에는 운동장 한쪽에 흙 가마터도 만들 예정이다. 이 폐교를 직접 고치고 다듬느라 2~3년이 훌쩍 갔다. 학교는 어느새 그의 작품이 되어가고 있다.
80년대 분신 정국, 미술패 동아리 활동이 자연스레 민중미술 운동으로 이어진다.
김희상 작가가 호남대학교 미술학과 입학 당시, 학교 안에는 학내 분쟁이 한창이었다. 자연스레 선후배들과 함께 학생운동에 참여했고, 87항쟁을 군대에서 겪고 제대 후 자연스레 선후배들처럼 미술패 동아리에 들어갔다.
1991년도 2월 졸업하기까지 2년 동안 그는 학내 미술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가 속한 학생 민중 미술운동 전국연합은 일종의 학내 미술패 연합으로 서울, 부산 등 지역마다 연합이 있었고, 함께 모여 걸개그림 등을 며칠 동안 그리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전국 학생들이 분신하며 운동하던 분신 정국이어서 미술운동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 자체가 가장 강할 당시였다. 1989년도 임수경 방북 당시 김희상은 한양대 전대협 집회에도 참석하여 걸개그림 등을 그리다가 전경들을 피해 도망도 쳤고, 굴속으로 피신하여 1박 2일 동안 깜깜한 굴속에 갇혀 있던 경험도 했다.
그는 대학에서 회화를 하다가 3학년 무렵 조각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미술운동을 할 당시에는 그의 전공인 흙을 만지는 조각 작업보다 걸개그림과 페인트 그림 등 도리어 페인팅 작업을 많이 했다. 그런 연유인지 그의 흙 작업엔 회화 느낌이 난다는 말도 듣곤 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전국 민족 민중미술 운동연합(이하 민미련)에 들어가서 2002년까지 활동했다.
20여 년의 미술운동을 넘어.
1990년대 초 김영삼 정권기까지 미술의 정치성이 극도로 강했던 시기로, 가장 강성인 민미련에 속한 그는 메시지를 담은 대자보, 벽보, 걸개그림, 깃발 등을 무수히 그렸다. 당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세대들은 학교 미술패를 통해 운동 1세대에게 체계적인 학습을 받았고, 전국적인 조직 체계 속에서 사회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즉, 미술로서 사회에 발언하고 참여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고자 했다. 개인의 창작품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만든 걸개그림이나 만장, 깃발 등 투쟁의 수단이 될 수 있는 ‘미술’로서 사회 현장에 나갔던 때였다.
1994년 민미련 조직이 해체되면서 광주 미술인공동체(이하 광미공)와 통합되었다. 광미공은 자기 작업실에서 개인의 창작을 통해 미술운동을 하는 방식이며, 민미련은 거리 즉 현장에서 미술로 활동하면서 ‘운동’ 자체가 목적인 미술로서, 서로 활동 방식이 다소 달랐다.
작가는 광주 민미련 해체 이후 소규모 단위 4개로 나누어 활동했고, 그중 한 곳의 대표로 활동했다. 당시는 전국적으로 추모비를 많이 세우던 때였고, 그의 작업 이력에는 박종철 서울대 열사 추모비, 이한열 연세대 초상 부조, 중외공원 김남주 시인의 시비 등이 있다. 당시 민미련은 해체되었으나 선후배 간에 긴밀히 활동했는데, 조직 내에 조각 전공자는 별로 없다 보니 조각과 관련되었을 때 자연스레 그가 참여하게 되었다. 작업은 일종의 협업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서울대 박종철 작품은 일을 선배가 맡아오면, 그가 흉상이나 부조 등을 했다. 김남주 시인 추모비, 현재 망월동 518 국립묘지에 있는 20m 부조도 후배들 몇 명과 같이 한 작업이다. 그리고 마지막 작업이 2002년 들풀 일곱 열사였다. 2002년 들풀 일곱 열사 제막식 날, 20여 년 미술운동을 한 작가는 대외적인 활동 대신 개인 창작작업에 전념하기로 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나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미술운동에서 1세대는 현재 60~70대, 작가는 50대 후반으로 2세대에 속한다. 미술운동은 본질상 혼자 할 수 없고 단체를 꾸려서 활동한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참여했기에, 활동비를 받지 못해도, 개인적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았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미술운동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인간 조직이 늘 그렇듯이 소수 리더 중심의 활동 방식과 다수 개인의 희생, 단체 활동에서의 보이지 않는 모순과 부조리 등에 대한 수많은 번민이 그의 안에 쌓여만 갔다. 2002년 들풀 열사 제막식 날, 그는 폭발했다. 폭발했다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내면의 폭발이었고,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금 혼자 있는 20년이나 조직에 속해 활동한 20년 두 삶에 대해 전혀 후회는 없다. 당시도 운동에 자체에 대한 회의가 아니고 운동을 하는 사람과 관계에 대한 회의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미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만의 창작,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였다.
작가는 2002년 이후로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고, 전시 참여도 많지 않으면서, 이전 폐교 작업장에서 약 10여 년 동안 작업만 했다. 처음에는 마음속 분노와 회의, 혼자라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어린 자녀들 돌봄 등의 의무와 책임감도 강하게 들어서 여러 활로를 찾아보고자 노력도 했다. 그러나 1년 반 후, 흙을 만지는 작업으로 돌아오면서 이 길이 내 길임을 다시 확신하며, 굶어 죽더라도 나만의 창작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사이 광주미술판에서는 그가 갑자기 사라지니, 미술을 접고 다른 길로 간 줄 알았다는 이도 있었다.
이 기간에 그는 무수한 습작을 했다. 5~6년 동안은 한국적인 것, 한국 전통으로부터 소재를 찾아 특히 민화를 소재로 거대한 화판 부조 작업 연습을 많이 했다. 이전에도 기념비 등을 많이 했지만, 이제는 한국 전통 도상(圖像) 연구를 위해, 혼자서 전국의 절이나 문화유산 답사도 다녔다. 당시 불상 모작을 많이 하면서 500 나한상, 반가사유상 등에서 영감을 얻어, 여러 작업을 시도했었다.
500 나한상의 재발견, 사람 꽃 시리즈의 시작
우연한 계기로 한 절의 나한상을 수리하고 복원하는 작업을 계기로, 작은 인물상 작업을 하게 되었다.
‘500 나한상’은 본디 불교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덕이 높은 성자로 추앙받는 500명의 아라한을 말한다. 작가는 ‘500명의 깨달은 이’를 민중이라는 모티브로 가져왔다. 일상의 인간, 인간의 삶의 본질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인물상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약 10년 동안의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면서 지금의 <사람 꽃> 작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람 꽃> 작업은 2013년 롯데갤러리 초대전을 통해 광주에서 개인전 형태로 최초 발표하였다. 당시 70점 정도였는데, 지금 180점까지 작업을 했다.
사람의 감정 ‘희로애락’ 즉 사람과 인생에 대한 작업이다 보니, 작업할 때 작가도 그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일례로,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사건이 그에게는 너무나 괴롭고 슬펐다. 우리 시대의 최악의 인재(人災)로 자녀와 같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수백 명이 사망, 실종한 세월호 사건의 본말을 지켜보며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분노와 괴로움, 고통의 감정이 극대화되어 작업으로 풀어내었다. 세월호 작업을 4~5점 했는데 그중 한 작품은 광주시립미술관에 소장되었다.
미술운동 20년, 개인 작가로서 20년, 그리고 앞으로의 미술
조직에서 20년 미술운동 후, 20년 개인 작업을 해온 그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일까.
그동안 누구에게도 나누지 못했지만, 그는 앞으로 10년을 바라보며 5가지 목표가 있다. 첫째는 10년 전부터 하던 인물상 사람 꽃 작업을 500개까지 해보는 것이다. 둘째는 미술운동 출신이자, 광주 사람으로서 서양 작가들이 피에타 작업처럼, <광주 피에타>를 해보고 싶다. 누가 의뢰한다고 해서 하기보다는 작가로서 그의 생애 최고의 작품이 될 수 있도록 욕심이 난다. 이런 작업은 작가 일평생에 한 번 나올만한 작업일지도 모르지만, 작가로서 순전한 작품에 대한 열망이다.
세 번째는 제주 4.3 페스티벌에 참여했을 당시, 한 평론가가 준 영감에서 얻은 목표다. 그 평론가는 당시 사람 꽃 작업을 보고서 ‘신라의 미소’하면 떠오르는 보물 제2010호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처럼, ‘광주의 미소’를 작업해보면 어떤가 하는 말씀이었다. 꼭 내 인물상에 그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다. 네 번째는 현대 도자 꼭두 작업을 해보는 것이다. 사람 꽃 인물상은 무유, 즉 유약을 바르지 않고 장작가마에서 구운 것이다. 그 작업의 특징상 유약을 바르면 느낌이 반감된다. 반면 그가 하고 싶은 꼭두 작업은 화려한 유약을 쓰고 인물상보다 훨씬 단순한 작업이 되게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작업실에 들어온 이유 중의 하나는 ‘운주사’가 가까워 자주 다닐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운주사의 천인천탑들을 보면서 스케치하고 많은 습작을 하고 있다. 여기서 보고 느낀 것들을 작가만의 조형적 작업으로 재해석해보고자 한다.
폐교 공간을 지역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스스로 선택한 고립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폐교를 두 번 작업실로 만드는 작업을 했고, 자신만의 예술, 작업 세계를 찾아가며 수없는 습작을 했다. 미술운동 시기의 미술을 도구삼은 기념비와 같은 작업에서 탈피하여 인간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성찰과 공부로 인간의 감정을 담은 인물상 <사람 꽃> 작업을 선보였다.
이번 폐교 작업장의 경우, 주민들이 이전 임대자에 대한 관계적 상처로 마을 외부자에 대한 거부감이 컸기에 주민들의 마음 문을 여는데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이곳이 자신 생애의 마지막 작업실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에 풀 하나 나무 한 그루에 정성 들이며, 스러져가던 학교에 사람의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매일 고치고 만들고 작업실을 먼저 만들고, 가끔 자고 갈 수 있는 독립공간으로써 별채를 만들었다. 많이 정리된 운동장 한편에 곧 흙 가마터를 만들 것이다. 또 하나의 목표는 반대쪽 교실들을 거주 공간으로 만들어보는 것이다. 작가들이 와서 이 자연 속에서 작업하며 교류도 가능할 것이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화순 군내 초등학생들이 찾아와 함께 작업도 해보고 이 운동장에서 다시 뛰어놀 예정이다. 동네 어르신들도 이제는 오며 가며 뭐하나 들여다보시며, 그를 격려하고 도와줄 부분을 물어오기도 한다. 20여 가구 남짓한 마을을 낀 이 학교는 지역주민들의 힘으로 만든 학교이다. 비록 작가가 사용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지만 주민들의 추억이 담긴 마을의 상징인 이 학교의 의미도 잊지 않는다. 언젠가는 마을 주민들과 그들의 손자, 손녀, 자녀들에게 흙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사회의 변혁이 거대한 조직과 구호들로만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 공동체 속에서 미술로서 사회에 발언하고 변혁하고자 한 시기를 지나, 지금 그는 개인의 창작과 폐교 작업실 공간을 매개로 삶의 공동체로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가고 있다. 이것은 민중미술 작가 김희상 작가의 미술운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글. 천윤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