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전시장으로 사용 불가능할 것 같은 폐허 공간들, 예컨대 곧 무너질 것 같은 건물 전체, 걸어 올라가기도 벅찬 상가 건물 6층 내부, 낡은 한옥, 지하 혹은 반지하 같은 것들이 과연 전시장이 될 수 있을지 경쟁하는 시험장 같았다. 대부분의 전시장은 불확실한 구조에 매달려서 짧은 수명을 다했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란 단기 임대차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 기간 종료를 비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대안 화이트 큐브 공간으로 삼기에 도시의 상가나 가정집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불규칙한 건축 구조는 그 자체가 바로 큰 장애물이었다. 또한, 상식적으로, 그런 구조에서 통상적인 미술 전시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공간은 유동적이며 불안정한 구조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곡예를 해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주제어는 ‘공간’이 된다. 예를 들면 물리 ‘공간’을 디지털 ‘공간’의 로그인 버튼으로 재인식한다든지, 폐허 ‘공간’을 고화질 노이즈 백그라운드 삼아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공간’의 퍼블리싱 소재로 삼는다든지, 폐허를 서브컬처, 게임 커뮤니티와 같은 온라인 ‘공간’의 재연으로 삼는 것처럼 말이다.
7 1/2 프로젝트는 현대 도시 속 폐허 공간을 점유한다는 점에서 예의 도시 규모 집단 미술 전시 실험의 최신 버전을 떠올리게 하지만, 결과적으로 전시 공간이 아니라, 전시장에서 느껴지던 시간의 기억을, 감각을 되짚게 된다. 그것은 추상적인 느낌보다는 정교하게 스캔 된 이미지에 더 가깝다. 종로구 종로22길 15라는 도로명 주소, 정확하게는 15와 17번 건물 사잇길 안쪽에 위치한 13-2 서울산전 건물과 그 안쪽을 빌려 쓰고 있는 본 7 1/2 프로젝트는, 엄밀히 이야기하면 공간이 아니라 공간을 구성하는 표피를 빌려 쓰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그간 폐허 전시 공간들이 특정 주소와 공간의 형태로서 홍보하고 규정짓고 온라인으로 재호출되던 것과 비교된다. 7 1/2 프로젝트는 큰 축척의 지도에서 거친 연필로 그은 선 같은, 인간스케일에서는 무척 모호한 경계로서 존재하는데, 전시장으로서 지정된 경계(주소지)는 여러 상점이 공유하는 자투리 공간들, 중정, 통로, 주변 상점들의 문, 벽, 구조, 무의미하게 튀어나온 어딘가 등을 지나며 정확성을 시험받는다. 이는 건물주 송복은 장학재단이 허가하는 한도 내에서 주변 공간들이 거의 마음대로 전시 가능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암시는 현재 진행되는 전시가 아니라 이전 전시가 표피에 남긴 흔적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대체 무엇을 파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전기기계 상점들이 에이트리움 처럼 덮인 나무/슬레이트/PVC로 만들어진 처마 아래에 있고, 늘어선 상점들의 유리문에는 검은색 시트지로 적힌 시들이 익숙한 지하철 스크린 도어 시구처럼 붙어있다. 이와 함께 주변 벽이나 바닥에 들러붙은 낱글자들, 문이나 벽의 스위치, 또는 건물의 바깥벽까지 반원을 비롯한 여러 기하 도형들이 붙어있는 것, 중정의 나무 주변에 있는 작은 화분과 금속 등의 요소들은 이전 전시 동안 작품으로 기능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모두 전시 공간의 배경이 되었다.
전시는 항상 배경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것이 깔끔하게 정돈된 화이트 큐브 공간일지라도 그렇다. 어쩌면 화이트 큐브 공간의 숨겨진 용도란, 실은 전시의 마지막, 이전까지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일지 모른다. 전시 끝에 남는 벽과 바닥의 테이프, 못, 테이블에 긁힌 자국, 먼지가 쌓인 공간 등은 그다음 작가의 전시를 위해서 깨끗이 청소되어야만 한다. 폐허 공간에서의 전시는 바로 이런 점에서도 꽤 용이했었다. 관리자가 지녀야 하는 청결 수치를 아득히 넘어가 버린 어지러움 때문에, 불안한 구조체에 이전 전시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어도 무리가 없었다. 심지어 폐허는 창고로 가야 할 전시품이 그냥 바닥에 놓여있다던 지, 관리자들이 자기 사무실처럼 공간을 쓰기도 편안했다.
두 전시 <7 1/2: 암호적 상상> 네 번째 ‘슬기와 민’과, 다섯 번째 ‘최선아’는 배경에 남는 흔적에 대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그래픽 디자인 듀오인 슬기와 민은 그들이 예전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진행해왔던 전시 작업들과 유사한 기법의 작품들을 전시공간에서 재연한다. 마치 건축가들이 상상의 공간에 ‘누끼 따놓은 피규어들’을 던지듯, 그들에게 작품이 놓일 전시 배경은 그 무엇이어도 상관이 없다. 다만 그 순간에 맞춰 가지고 있던 카드들 중 하나를 여러 매체에 적절히 인쇄해 내놓을 뿐이다. 하지만 작가 최선아에게 공간의 흔적이란 작품에 들러붙어 떨어뜨리기 어려운, 거의 합성(merge)된 레이어들과도 같다. 최선아는 작품들을 전시장의 곳곳에 붙이고, 경계를 부드럽게 합성해 나간다. 합성하는 작가의 붓질과 사이노그라피 작품들은 모두 ‘유일한 것’들이다. 두 전시의 차이는 흰색 전시실의 내부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극명하게 나뉜다.
본 전시장의 유일한 흰색 방은 입구 쪽에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이곳이 미술 전시를 위해서 만들어진, 7 1/2 프로젝트의 전시장임을 알리는 일종의 상징적 화이트 큐브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슬기와 민은 이 공간에 온라인 도표 제작 프로그램 “컨셉트 드로잉” 과 같은 제목을 지닌 첫 번째 전시 작품을 놓았다. 작품은 온라인 사이트의 컬러파이차트 예시 이미지를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크게 확대하여 흐릿하게 인쇄한 천이다. 천은 전시장의 바닥, 천장, 벽의 4면을 모두 피해 구조체인 보에 매달려 커튼처럼 쳐져 있다. 천에 인쇄된 흐린 그래픽 이미지는 그나마 남아있던 경계 만들기-혹은 관람객의 인스타그램 용 스테이지 만들기-조차 뒤틀어 버린다. 불투명한 흰색 천에 인쇄된 파이차트는 분명 공간적으로 투명성을 상징하지만, 실제론 불투명하다. 앞뒤 천에 인쇄된 파이차트는 모두 다르다. 이런 투명성의 경험은 광학 도구로 포착하기 어렵다. 뿌옇게 흐려진 이미지가 갖는 모호한 거리감을 중앙에 놓인 흰색 공간과 가운데의 흐릿한 차트만으론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다. 어떤 방법을 쓰건 실제 공간에서 관측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알던 투명성과는 다른 결과를 재확인할 뿐이며, 또한 역전된 해상도 탓에 사람을 포함하거나, 공간의 바깥 프레임 (노이즈가 가득한) 까지 담을 때야 짐작 가능한 작품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반면, 최선아 작가의 블루프린트 시리즈 (#7, #8, #9, #10, #18, #22, #21, #27,#24, #32) 는 과거 건축가들에게 기록물로서 친숙한 청사진과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이것은 원본과 1:1로 대응하며, 그 자신이 바로 원본이 된다. 작가는 이 프린트 시리즈들과 벽화시리즈 〈wall painting 15 Jongno 22gil〉를 벽면에 둘러 전시하였다. 이 절대적 시간과 장소성을 가진 작품들은 다시 공간을 여러 색과 재질로 쪼개지게끔 배치되었는데, 이를 통해 공간에 잠재되어 있던 본래의 한옥 구조들이 도드라지게 된다. 이는 두 가지 효과를 지닌다. 하나는 프로젝트 전체에서 유일한 기념비 역할을 하던 흰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페인팅과 촬영 작업이 갖는 공간과의 합일 성을 더욱 드러낸다는 것이다. 벽화는 흰색으로 칠해진 벽에 있던 기하학적 패턴들, 걸레받이, 미묘한 불일치를 페인팅과 함께 드러낸다. 부서진 벽, 배관, 주춧돌 같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형성한다. 이는 반사 재질의 판이 덧대어진 청사진이 옆의 흰 벽 위에 올려져 완전히 다름을 주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반사 재질은 다시 관람자에게 벽화와 주변 상황을 청사진 위로 얹어 보게 한다.
긴 흰색 방을 지나 코너에 놓인 진열장은 프로젝트의 또 다른 전시장이다. 이 위에 놓인 물건들을 보아도 두 전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슬기와 민의 〈회색 편지지〉는 신경 써서 이어붙인 노이즈 텍스쳐들이다. 이것들은 3D 모델을 위한 콘크리트 재질감처럼, 얇으면서 깊이가 있다. 사실 이런 벽지나, 무늬목, 데코타일과 같은 얇은 가짜 질감 샘플들은 을지로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이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 섬세한 회색 노이즈 패치워크가 철과 유리로 된 선반 위에 딱 붙어 올려져 있는 것은 퍽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선반 바로 아래쪽에 놓인 〈녹지 않습니다〉 역시 충무로나 을지로 어디서나 볼 수 있음 직한 독립출판 디자이너들의 굿즈 배지 샘플과 똑같다. 작품은 부제목(데이비드 해먼스에게 바친다.)과 그 용도(배지) 또 작가 슬기와 민(지난 십 년간 서울의 독립출판 흐름을 이끈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통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 어느 것도 명쾌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앞의 파이차트 이미지와 정반대로, 그 어떤 흔적보다도 이미 완벽하게 이 공간에 녹아(merge)들어 버린다.
그런데 최선아 작가의 <엽서(post card work)> 시리즈는 손글씨, 엽서라는 양식, 뚜렷한 색상 등으로 본 공간과 다른 시간과 감각을 갑자기 끌어들인다. 수채화로 그려진 엽서들은 습기를 머금어 둥근 배처럼 휘어버렸는데, 이는 바닥의 유리 진열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모든 요소는 다시 벽화와 청사진에서 보여주던 단단함, 완전함, 접착, 합일과 정반대의 감각을 드러낸다. 작품은 표피에서 계속 떨어져 나오려 하며, 제각기 나름의 시간을 담아 닳은 질감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질감은 앞선 유사 화이트 큐브에서의 합성을 극대화하는 장치이다. 이는 슬기와 민의 마지막 작품, <작품 목록: 7과 2분의 1>이 추구하는, “떨어뜨리고(purge) 싶은 감각”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앞선 모든 작품의 제목, 년도, 재료, 크기를 담아낸 하이그로시 코팅 오브젝트는 심지어 목록 저 자신의 제목까지도 함께 새겨놓은 체 장식장 맨 밑 선반에 놓여있다. 그래픽 작가의 작업 답지 않은 두께를 지니고 있는 본 작품은 전시가 끝나고 작품들이 치워지는 미래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즉, 이 명판을 치워버리는 것으로 슬기와 민의 그 어떤 작업도 흔적을 남기기 어려울 것이다. 프로젝트 7 1/2에서 본 작품 목록과 공간은 아무 관계없이 존재한다. 단지 ‘목록’이란 단어에서 컴퓨터 환경에서 레이어를 켜고 끄듯, 표피서부터 가장 완벽한 삭제를 가능케 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는 있다. 이윽고 완벽히 지워진 공간에서, 최선아 작가의 벽화와 청사진들은 공간의 흔적들을 새롭게 정의 내리고 또 한 번의 원본을 얇게 남겨놓는다. 깔끔하게 마감에 임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다운 태도와, 모든 것을 합쳐버리려는 작가의 태도는 다시 진열대에서 모순된 자기 작품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모든 흔적을 천천히 쌓고 기록하려는 전시공간 기획은 ‘공간’이 아니라, 표피에 남겨진 것들로 ‘뒤섞인 시간의 감각’을 재현한다.
정 현 (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