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전을 돕는다. 정확히는 비즈니스를 운영해 사회적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을 지원한다. 사업이 본궤도에 올라 선순환을 구축하게 되면 사업의 혜택을 받는 사람의 수와 더불어 사업적 혜택을 늘릴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업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보고 그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몇 년 전, 한국개발협력의 미래를 고민하는 한 조직의 지원으로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캄보디아는 ‘발전’을 살펴보기에 적합한 사례이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믿는 사회적기업을 통한 지속 가능한 발전에 확신을 얻고 싶었다. 나는 캄보디아에서 만난 현지 통역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떠한 발전을 원하냐는 간단한 나의 질문에 현지 통역사는 한국에서 말하는‘발전’이라는 단어에 적합한 캄보디아어가 없다고 답했다. 의아했다. 나는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질문하였고, 그 과정에서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앞으로 10년 뒤에 캄보디아나 지금 거주하는 마을이 어떻게 변하길 바라세요?”, “아이들이 10년 뒤에 어떠한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나요?”발전을 주어 입장에서의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꾸어 말한 것이다. ‘발전’은 주어가 원하는 미래의 긍정적 변화인데 나 역시 구체적인 주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누군가가 원할 것 같은 미래를 단순히 ‘발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보다 더 발전된 내일을 원한다. 오늘날 발전은 개인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의 차원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러나 그 발전을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많지 않다. 만약 발전을 그리는 주체가 당신이라면, 당신은 발전이라는 단어 안에 무엇이 숨어 있기를 기대하며 발전을 원하는가?
‘발전한 나라, 대한민국’, 살고 싶은가?
높게 솟은 빌딩들이 만드는 화려함. 깨끗한 거리. 마치 새 옷처럼 잘 세탁된 세련된 옷을 입은 사람들. 갤러리처럼 화려하고 깨끗하게 꾸며진 공용화장실. 세계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그래서인지 간판만 보아도 안심이 되는 각종 프랜차이즈 매장들.
한국은 세계에서 29번째로 소위 선진국 클럽인 OECD(국제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 하였으며, 2021년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는 2021년 대한민국을 선진국(developed country)으로 분류했다. 2020년 경제 규모로 볼 때 세계 10위권의 국가이며, 개도국과 최빈국 등에 지원하는 지원금인 공적개발원조기금(oda)의 지난해(2021년) 예산 규모는 2,855백만불. 즉, 3조 원을 넘었다.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에 도움을 줄 정도로 잘 사는 나라로 발전했다는 것에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면, 당신이 바라는 발전은 무엇인가? 무엇이 당신을 머뭇거리게 할까?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은 그의 저서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발전’은 개인이 소중히 여기는, 혹은 소중히 여길 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의 확장”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확장은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이 아닌, 인간이 불안함을 느끼지 않고 자신의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이기도 하다. 앞서 이야기한 잘사는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나는 센이 말하는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내 사정은 이렇다.
지금은 매일 일 해서 먹고살고, 친구나 가족에게 사람 노릇을 하는 데 지장이 없다. 그러나 내가 아프거나 번아웃이 와서 일을 쉬게되다면 몇 년, 아니 몇 달은 생활비를 버틸 수 있을까? 아마 한순간에 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다. 집 대출금과 은행 이자부터 시작해서 각종 공과금과 교육비를 내려면 벌써 까마득하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들어간다는 말에 공감한다. 가족 중 누가 아프기라고 한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질 것이다.
상황이 나으면 나은 대로 아이들이 원하는 공부를 시키고, 부모님께도 철마다 기분 좋게 선물과 용돈도 척척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보장성 좋은 보험 상품을 가입하고, 가능한 저금과 투자를 통한 여유자금도 있어야 한다. 지금의 나이와 위치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생각해 볼 여력은 없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생활을 제치고 시도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나는 불안하다.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헬조선은 취업난, 주거난, 저출산을 겪고 한국에서 사는 것이 지옥 같다는 것에 빗대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꾸준히 성장했다. 1989년부터 2019년까지 약 30년 사이 한국의 1인당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458원에서 36,040원으로, 1인당 국민총소득(GDP)은 389만원에서 3,754만원으로 각각 10배 가까이 상승했다 E-나라지표.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었는데도 돈의 상대적 가치는 계속 줄어들었고,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인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한국에서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른바 ‘체감 중산층’ 이 급감하고 있다. 2019년 갤럽조사 1989년 갤럽 조사에서는 국민의 75%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지하고 있었던 반면,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은 48%만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지하고 있다. 내가 생산성을 높여도, 필요한 돈은 점점 더 늘어난다. 아마티아센이 이야기하는 자유로서의 발전은 아직 한국에서 먼 이야기 같다. 한국의 예를 들었지만, 아마 한국뿐만 아니라 소위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도 많이 하는 생각 아닐까? 나는 발전이란 “잘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은 “나라와 개인에게 안전하고 편하게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충분히 많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라마 속 대사처럼 “돈, 얼마면 될까?” 로 물어서는 이제 더 이상 답이 없다.
모두가 잘 잘기 위한 사회적 목적, 지속가능한 발전이면 될까?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는 사업의 방식이라고 해도 발전에 다시 한번 물음을 가져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보통 이러한 사업은 사회적기업, 사회적 경제 조직으로 불리며, “다른 비즈니스와 달라.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목적으로 운영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사실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리고 소비할 수 있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더 많이 늘리고자 한다(이걸 포용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소셜한(사회적인) 사업 모델이라도 지속가능하게 사업을 운영하려면 중요한 것은 결국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판매하는 가치 사슬의 회전율을 높이고, 이 가치 사슬을 지속가능하게 돌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낼 수 있는 부가가치가 많아지고, 사회적 가치 또한 더 많아지고 지속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사회적’이라는 것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달콤할 수는 있어도, 더 많은 생산을 통해 나타나는 상대적 박탈감과 우리의 불안을 줄여 발전을 만들어 줄 수는 없겠다. 사회적기업의 한계를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사실, 사회적기업, 사회적 경제는 지속가능발전에 많은 대안과 솔루션을 이미 고민해왔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가 선한 의도로 열심히 일해 발전해야겠다고 쓰는 노력이 더 발전에 역효과를 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람들이 더 편안할 수 있도록, 더 고통 없이, 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는데 필요한 에너지와 배출해 내는 공해가 오히려 지구를 지속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있다. 그걸 깨닫고 지구를 생각하는 탈탄소정책, 제로웨이스트, 순환경제를 이야기하지만 개인과 일부 몇 나라만으로는 위기의 추세를 변화시킬 수 없다. 이제 막 열심히 생산하고, 소비하기 시작한 사람들과 개도국을 이해시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모두 각자의 원함대로 생산하고 소비할 경우, 지구가 지속불가능해질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원하는 발전에 이를 수 있을까?
너무 진부한 이야기지만, 먼저 스스로에게 ‘왜 사는 지’에 대한 물음을 답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왜’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고, 공감대를 갖는 것 필요하다.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와 받아들임 말이다. 그에 더해,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보다는 유한한 생명을 가진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겸손해지는 것도 중요하다. 인류가 지속가능하면 좋겠지만, 지속가능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성만 따지게 된다면 앞서 밝힌 내 이야기처럼 불안함으로 내리지 못하는 혼자만의 쳇바퀴 속을 계속 달리게 될지 모른다.
상상력을 발휘해, 물욕 없이, 식탐 없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없이 무결한 존재가 되면 우리는 발전했다고 느끼고 만족할까? 지속가능하기위해 필요한 자원을 최소화하고, 공해를 줄이고 효율적인 존재로 삶을 이어 나가는 것만을 바라게 된다면 행복할까? 결국 그러한 욕구의 중심에 있는 몸을 버리고 어느 소설 속처럼 온라인 네트워크에 의식만 존재하는 삶을 꿈꿀 수도 있겠다.
발전은 단 하나의 구조인 나 혼자, 유일한 무엇으로는 이를 수 없다. 불안함 없이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려면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해도 누군가가 필요하다. 다른 존재의 ‘발전’을 돕는 것. 그것을 통해 나도 더 나아짐을 경험하는 것이 발전의 과정이다. 그러려면 나와 달라도 동등한 존재로서 그 존재가 진짜 필요한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먼저다. 미래에 지속가능한가에 대한 불투명한 두려움으로 나와 내 미래세대의 지속가능성 추구에 염려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기보다, 언젠가 끝이 있는 존재로 지금의 나, 그리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 충분히 즐거워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수명, 우리 종의 수명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다른 존재의 욕구를 살피는 여유(space)와 가벼움이 중요하다. 존재로 행복하기 위해 오감을 열고 사는 것, 다른 존재와의 연결 가능성에 열린 마음일 것, 그 자체에 충분함을 느끼는 것 말이다. 결국 지금 살아있는 나를 포함한 존재에 관대하고 존재의 아픔을 줄이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지금 먼저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불안이 줄고 바라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면, 그때 우리는 ‘발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지속가능한 우리’를 위해 지구생태계 보호와 지구적 연대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무엇부터 실천할 수 있을까? ‘함께’는 필요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관심과 고마움,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하다. 또한, 내가 총량 안에서 닳아지는 무언가를 쓰고 있고, 이는 우주, 또는 다른 존재가 허용하거나 양보한 공동의 유산을 헐어 쓰는 것임을 인지하고, 나도 우주와 다른 존재와 나의 것을 나누는 결심이 생기면 좋겠다.
기상이변과 바이러스, 행성의 한계를 몸소 느끼는 요즘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일몰하지 않을까? 그때 나를 포함한 지구상의 존재들이 존재만으로 존중과 감사를 받으며 불안함 없이 만족할 만한 발전된 세상을 살다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글쓴이: 이명희
사회적경제 조직을 목적에 맞게 평가하고, 지원하는 일을 한다. 사회적경제조직이 일을 하는 이유, 지속시키고자 하는 긍정적인 변화를 함께 찾고, 지표를 설정해 조직 내부에서 사업 목표를 공유하고, 외부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는 것을 돕는다.
참고자료
박돈규, “‘중산층’이 사라진다.” (2021)
국가지표체계 www.index.go.kr
월드벵크 data.worldban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