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슈뢰딩거와 예술사회학

고양이는 호기심 많은 요물이라던데… 요물이라 하지만 서양의 고양이들은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죽는다 한다. 그리고 어떤 고양이, 그러니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언제 청산가리가 뿜어져 나올지 모르는 상자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의 생사여부를 아무도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양이의 생사를 가르는 이치가 바로 세상의 이치와 같다고 하니 호기심이 발동하기는 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뭐, 열어보면 되지’ 했지만 양자역학자들은 ‘관찰자 효과’라는 놈이 있어서 상자를 열어보는 사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한다. 그러니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닌가 보다. 양자역학자들이 하는 말인즉슨, 일단 내가 열어 보았을 때 고양이가 살아있다면 상자를 열어보는 나, 그때의 정황, 고양이의 생사 여부라는 사실들의 조합이 내가 사는 우주의 현실로 결정된다는 일이어서 상자를 열어 보았을 때 고양이가 죽어있을 경우의 현실(의 조합)은 또 다른 평행우주의 소관이 된다고 한다. 인간이 가진 궁극적인 호기심이란 두 가지 경우를 함께 아우르는 세상의 이치일 터인데 ‘나’라는 관찰자의 우주와 ‘너’라는 관찰자의 우주가 다르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과학이 발견한 진리라니… 달리 말하자면 그 ‘나의 세상과 너의 세상 전체의 이치란 알 수 없다’가 세상의 이치라는 셈이니 참 알량하다. 믿을 수 없다는 마음에 이 책 저 책을 들여다보아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절대로 확인은 할 수 없다는 철학자들의 연구와 마주하게 될 뿐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세상의 이치는 ‘나’와 ‘너’ 라는 인간의 선택에 따라 우주가 결정된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 것 아닌가? 세상의 이치가 선택하는 것이라면 다른 인간의 선택이 어떠한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인가? 내가 이렇게 숨을 쉬면서 경험을 하고 그 경험에 대하여 즐겁거나, 이상하거나 혹은 분노를 느끼거나 하면서 이에 따라 명료한 판단을 만들 수 있는데 다른 사람도 같은 판단을 내리지 않는 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나와 타자’ 사이의 간극이라는 것을 탐험하는 것만이 우리의 원초적인 호기심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보인다. 한편 ‘나’와 ‘너’의 관계를 구조로 분석해 보는 것이 사회학이라면 이러한 사이의 간극의 탐험은 사회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도 만들어진다.

 

<7 1/2 프로젝트>를 간간이 들여다 보면서 그리고 한 시간이 넘도록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나누던 이야기를 통해서 드는 생각은 <7 1/2 프로젝트>를 기획한 오선영도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바가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까지 이해해 보려는, 그래서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는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프로젝트의 제목인 7 1/2 이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에서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 즉, 다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7층과 8층 사이의 공간에서 가져온 것임을 고려하면 <7 1/2 프로젝트>는 아직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간극을 이해해보려는 철학의 기원과 닮아있다. 더구나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니라는 경계선이 사라진, 그리고 예술인이나 비예술인이나 각자가 ‘무엇이 예술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오늘의 사정이다. 그래서일까? 이러한 환경에서 전시 기획자로서의 오선영은 나와 당신의 간극에 대한 탐구를 위해 예술을 끌어들인다. 그러하기에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 그리고 예술인과 비예술인들 사이의 간극을 항해하는 <7 1/2 프로젝트>는 예술 사회학이다.
예술이라는 배를 탄 간극의 항해는 이성으로부터 출발해 감성을 통과한다. 스테이트먼트에도 드러나듯이 이 프로젝트는 “예술을 지식과 제도의 영역 속에서 먼저 해석하고 위치시키는 순간 다가왔던 감각들을 쉽게 잃어버리게 됨”을 문제로 제시하면서 이성과 감성의 땅을 모두 정복하려는 포부를 가진다. 이성이 객관의 언어라면 감성은 주관의 언어이다. 감성의 영역은 무의식의 세계에 위치하기 때문에 언어화 할 수 없는 영역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무의식의 영역을 이해할 수 있다면 타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포스트모더니즘은 타자를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포기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 1/2 프로젝트>의 2014년 《예술과 무의식의 인류학적 탐사》강연은 감행되었다. 이 강연에서 받은 인상은 이 강연이 김남수 선생의 연구가 인간이 이성과 감성의 간극을 헤아려볼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예술가는 일종의 샤먼으로서 이성, 즉 수학적으로 이해되고 답을 얻을 수 있는 현상계와 그 너머의 세계를 매개할 잠재성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작가는 예술과 비예술을, 자신과 타자 사이의 간극을 매개하거나 보여줄 수 있을까? 최근 프로젝트인 《존재하지 않는 경계 Enter Nowhere: Down the Rabbit Hole》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주려는 시도라 한다. 그것이 보여주는 공간은 현실이지만 현실의 규칙을 적용할 수 없으며 때로는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장소라고 한다. 여기서 <7 1/2 프로젝트>가 탐험하는 간극은 어느 위치에서 조망된 것일까? 그 전시가 제시하는 존재하지 않는 경계는 중간의 세계 혹은 간극 안에서 바라본 간극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이성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틈? 감성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이성적 현실세계? <7 1/2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프로그램 중에서 이와 관련되어 보이는 것은《기능적인 불협화음》이었다. 관람을 하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이 프로젝트는 감각하기 위해, 혹은 타자와 함께 공존하기 위해 ‘나'(작품)을 무장 해제시킬 것을 작가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작가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자)의식세계를 포기를 했을 때 혹은 무장해제를 했을 때 나와 타자 사이의 간극은 탐험될 수 있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7 1/2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시도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선영은 다른 전시를 설명하는 텍스트에서 《기능적인 불협화음》의 무대가 되었던 지역인 문래동 철공소 골목 원주민들과 예술가들 사이의 괴리감이 드러나는 해프닝이 있었음을 시인하였다. 그 해프닝은 퍼포먼스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퍼포머가 철공소를 “처박혀 기다리는 … 낡은 무엇”이며 “우리를 경계”하는 무엇이라 지칭하였을 때 일어났다. 이 말이 퍼포먼스를 보던 철공소 아저씨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 아저씨는 ‘네가 뭔데…’하시며 화를 내셨다. 그 해프닝을 보고 우리는 작가들의 무장해제가 덜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 다른 해석은 문래동이라는 철공소 아저씨들에게는 보금자리였을 장소에 대한 퍼포머의 표현에 철공소 아저씨들은 동의를 할 수 없었으며 한 장소가 시각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면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자격은 과연 누구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선의의 무장해제’는 ‘나와 너’ 사이의 간극을 무너뜨릴 수 없는 아직도 ‘이성의 언어로 작동하는 관념의 경계’를 넘어 설수 없었다.
여기서 오선영은 그 간극이라는 것이 이해함으로써 해결되거나 포획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생각을 접는듯하다. 대신에 ‘관계’를 통해 타협해 보는 모험을 시작한다. 사회학자인 랑시에르는 우리가 사는 우주가 불일치라는 키워드로 작동된다고 생각한다. 합의란 그의 사전에는 누군가에 의한 정복이고 전체주의와 다름없다. 인간이란 그저 타협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며 그러는 인간의 의도는 윤리적이다. 이와 유사하게 <7 1/2프로젝트>의 후기에 해당하는 프로젝트는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엮을 발생하는 관계의 다이내믹을 보여준다. 그 예가 《여기, 나는 누구인가》 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의 간극이 어떤 식으로 벌어지고 좁혀질 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모험이란 그런 것이다” 라는 선언에 이어서 마련된 《여기, 나는 누구인가》 행사에는 문래동 철공소 골목의 터줏대감, 최씨 아저씨가 포함되었다. 퍼포먼스 안에서 그는 예술가들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하여 조언을 하는 대륙공업사 사장님 본인으로 등장한다. 그의 등장은 예술과 비예술이 서로 엮이는 장소를 만들어 내었다. 예술 행사의 한 몫을 차지한 그는 이로서 미적 경험, 미적인 것의 창조 현장과 관계를 맺으면서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인 행세를 하였고 관람객이었던 대부분의 예술관계자나 퍼포먼스에 같이 참여하는 연기자들은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였다. 그가 비예술의 영역이 정의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말로 전달하거나 간극을 말해줄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간극이란 인식되는 것이지 말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은 금새 타협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겨우 이삼십 명 남짓한 예술인이었던 우리는 적어도 ‘타자’와의 간극을 감각하였고 그것은 훗날 ‘내’가 열어 볼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와 연결된 우주에 영향을 미칠 터이다.

 

신현진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