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가 오래 시간을 끌어서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작가님께서 보내주신 글을 받고 당황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군더더기 없이 자명한 작업인데, 자명하게 해설된 작가의 글까지 있으니, 사족이 되지 않는 평문을 제시하려면 어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봤습니다. 보통의 경우처럼 질문하고 답하는 것으로 사실을 그러모으고 메모를 작성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으나,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습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작성한/인용한 메모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최적화’시켜서 내일 저녁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최선아 작가님의 작업 세계에서 일관되는 특징을 ‘시적 최적화’ 혹은 ‘최적화의 시학’이라고 전제한 뒤, 그를 의태하는 방식을 차선으로 택했는데, 기대와 달리, 읽을 수 없는 글이 나오는 등, 잘 풀리지 않았더랬습니다.) 두 분께 양해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12월 22일 목요일, 임근준(이정우) 드림
0. 망한 평문을 재구성해 시적 에세이를 반자동-출력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쓰지 못할 글이 나와서, 예의 ‘메모의 목록’으로 대치한다. 억지로 쥐어짠 느낌이 강하지만, 그것은 할 말이 없었다는 뜻도 아니고, 글을 쓰기 싫었다는 말도 아니다. 평문을 작성해 ‘작가’와 ‘작업’과 ‘작가의 글’과 함께 배치하는 다이어그램적 상황을 그려내는 방식이나 감각에 대한 이야기다. ‘메타-최적화’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튼, 이 글은 평문보다는 감상문이나 수필에 가깝다. 붓 가는 대로 썼다고 우기고 싶기도 하다.
1. 7 1/2: 암호적 상상은, 2016년 4월부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2길 15번지에 마련된 임시적 양태의 갤러리에서 연속적으로 전개된 전시 기획 프로젝트였는데, 제5회의 주인공이 최선아 작가였다. 10월 8일 토요일 오후 5시에 개막한 전시는, 11월 5일까지 이어졌다. 해당 공간에서 전개되는 프로젝트로는 마지막이라고 들었다. 기획자 오선영은 7 1/2 프로젝트에서 매해 하나의 주제를 정해 유지해왔으므로, 2016년의 주제였던 ‘암호적 상상’이나, 서울 구도심의 경공업 상가 밀집 지역에 마련됐던 전시 공간 등은, 작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담론적/물리적 제약인 동시에, 적당히 번역해 활용할 수도 있고 활용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개념적 지지대로 여겨졌을 게다.
(어떤 작가들은, 제 작업을 ‘기회 특정적’이고, ‘예산 특정적’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어차피 중장기 프로젝트로 여러 갈래의 작업을 전개하고 있으니, 기회에 따라, 예산에 따라, 전시되는 작품의 [최종적이진 않지만] 최종적인 형태를 결정지을 수밖에 없다는 뜻의 자조적 농담이기도 하다. 큐레이터가 어떤 대주제를 제시하는 경우, 그에 맞춰 명작을 창출해내는 작가는 많지 않다. 아트스쿨에서 교수가 정한 주제에 맞춰 과제를 해야 하는 학생들도, 결국엔 [어떤 층위나 차원으로든] 저 하고 싶은 것을 해버리는 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시된 제약 조건이나 주제를 존중하는 자세로 작업하는 작가가 있다면, 기만적 태도로 존중하는 척하는 작가 연기자형 작가가 있고, 또, 만사를 무시하는 척하지만 조건이나 주제에 걸맞은 작업을 하고 마는 작가가 있다면, 아예 무소의 뿔처럼 평소에 하던 걸 그냥 해버리고 지나가는 작가도 있다. 내 경우 처음엔, “암호적 상상”이라는 대주제를 ‘암호화된 상상’으로 이해했다. ‘어떤 이유로 남에게 밝힐 수 없는 본의나 원안’에 대한 유비로 해석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전시들을 둘러본 뒤엔, ‘기획자의 정념과 작가의 정념과, 기획과 작업에 깃드는 정념과, 관객의 정념 사이의 간극과 미끄러짐’에 대한 유비라고 해석하게 됐더랬다.)
2. 최선아 작가의 작업 방식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상징 형식으로서의 성찰적 퍼스펙티브(혹은 다중적 퍼스펙티브)를 시각뇌에 장착한 상태로, 이질적이거나 상호 무관한 대상이나 재료나 주어진 제약 조건 따위를 특정한 차원이나 배율로 재포착해, 일종의 개념적 렌즈나 레이어처럼 작동하도록 변환해내고, 또 그를 재귀적 방식으로 상호 중첩 혹은 충돌 혹은 반응시킴으로써 미적으로 최적화된 과정—미술처럼 뵈는 무엇을 거의 자동적으로 도출해내는—을 기획해낸다. (미술처럼 뵈는 결과를 도출하도록 과정을 기획하고 조형하는 과정에서 어떤 타입캐스팅 논리가 작동한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참조적 전유(referential appropriation)를 통해, 인용하는 대상과 인용하는 방식과 인용하는 태도와 인용하는 주체 사이의 거리를 표지하고, 그를 통해 모종의 시적 현대성을 갱신해낸다.
(2010년대의 오늘의 시공에서 방법론적으로 유효한 전유는, 원본을 공격하는 자세로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인용된 과거’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 혹은 확보하는 방식으로, ‘과거’와 ‘인용된 과거’를 전유하는 것이다. 2010년대의 일부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발견되는 어떤 문제적 참조성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참조성이나, 모더니스트의 자기-참조성과 같은 종류라고 오인하기 쉽지만, ‘과거’와 ‘인용된 과거’로부터 ‘나’를 이격시키는 감각은, 혹은 오늘의 것을 인용해 모두 어제로 만들어버린 뒤 ‘나’만 홀로 따옴표를 두른 ‘오늘’로 이행하는 감각은, 역사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3. 작가의 글엔 이미 정답이 제시돼 있다: “나는 이 세상의 법칙이나 규칙성을 관찰해, 거기에서 도출된 관계를 어떤 필터처럼 작업에 대응시켜보곤 한다. 그 관찰의 결과들은 자연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팩트나 원리일 수도 있고, 척도로서의 인간의 몸일 수도 있으며, 한 사회 안에서 집단적 기억에 각인된 일상적 관습일 수도 있으며, 평범한 사물이나 일상적 상황일 수도 있다. 이 도출된 관계성을 어떤 구체적인 재료나 물성과 만나게 해서 미적 형태이나 구조를 얻는다. 이 과정을 나는 시각적 번역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번역은 말하자면 직역이 아니라 의역이다.
4. 작가는 굳이 ‘번역’이라는 유비를 동원했다.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일종의 자가-변형 알고리즘으로 상상해보게 된다. 기존의 번역 패턴을 학습해 번역의 질을 개선하는 알고리즘 말이다. 최적화하는 알고리즘으로서의 미술가.
5. 한국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작가의 글에선, 자신의 목소리를 모니터링하는 자아가 도드라진다. 모든 저술가의 글에서 음성적 성찰성이 발견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문인들은 제 글을 낭독하는 목소리를 관리-감독하는 메타-자아를 갖고 있다. 물론, 글을 읽는 가상의 목소리에도, 공식화한 비공식적 버전(수필에서 흔히 사용되는)과, 공식화한 공식 버전(선언문에서 사용되는)과, 비공식적 공식 버전(필명을 통한 비판에서 사용되는)과 비공식적 비공식 버전(비공개 텍스트에서 사용되는)과 아바타/에이전트 버전이나 복화술 캐릭터 버전이나 대독을 대신하는 음성 엔진 버전 등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가 문학 작품을 쓴 것은 아니니까, 글에서 감지되는 이중의 자아는, 온전히 작가 자신일 테다.
6. “도출된 관계성”이라는 표현에 유의해보자. 니콜라 부리오가 관계적 미학에서 이야기한 ‘관계성’은, 기존의 담론적 장소 특정성을 대치하는 관계 특정성을 뜻했다. 재생된 폐허의 미술관에서 모호해져버린 예술의 인식론적 위상과 현존 방식 등을 역이용해, 판단 유예의 장막을 쳤다고 풀어 말할 수 있다. 그 덕분에 과거의 실험적 메소드를 1998-2008년의 오늘에 소환해 재활용-리믹스-매시업하는 등의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최선아가 말하고자 하는 관계성은, 그러한 판단 유예의 장치를 뜻하는 것은 아닐 터. 그는 자신의 알고리즘으로 전유된 어떤 대상이나 법칙이나 조건 등을 하나의 다이어그램으로 인식하고 그에 특정성을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미적으로 최적화된 과정을 구성해내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정련된 요소들의 최적화된 관계, 어떤 시적 동세를 창출해기 위한 기우뚱한 균형의 관계, 그것을 일단 “도출된 관계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7. 벽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수립하기 위해, 작가는 장소의 담론적 특성과 장소의 물리적 제약에 다중적으로 반응하는 태도와 방식을 취했다. 작가의 글에서 그는 “장소 특유의 디테일들을 은유적, 우회적으로 내 전시에 반영하고 싶었다”고 했다. 한데, 이러한 작업 방식이나 태도는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역시 이를 개선된 알고리즘으로 읽으면 더 재밌어진다. 전시장의 구멍을 인용해 재귀적 벽화를 만들어내는 논리를 꾸며내는 과정에서, 흥미롭게도, 작가가 표현을 자제하는 어떤 ‘개성’이 도드라진다. 그는 벽 너머에 서서 공간을 바라보는 비정상적 퍼스펙티브를 상상하는 즐거움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비정상적 퍼스펙티브의 구현 충동은, 종종 여성이나 성소수자 작가에게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2차 창작을 일삼는 후죠시들의 경우, 전지적 화분 시점이라는 것을 공유한다.) 퍼스펙티브의 문제를 성찰하는 일군의 여성 미술가들은, 메타 공간으로 재인식된 순수평면으로서의 캔버스 너머에서 자신과 그림과 관객을 바라보는 상상을 하곤 한다. 나는 농담 삼아 이를, ‘절대타자의 시선’이라고 부른다.
8. 벽화 제작에 관해 작가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가루안료와 바인더를 섞어서 물감을 만들었고, 묽은 수채화 기법으로 벽화를 그렸다. 색이 흰 벽을 덮을수록 벽 위로 더욱 선명하게 올라오는 과거의 흔적이 흥미로웠다. 구멍을 메꾼 자리나, 갈라진 선을 보수한 흔적은 색이 덮여지면서 오히려 도드라지고 강조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최선아의 벽화는, 일견, 지지체로서의 순수 평면을 가리는, 원근법적 시선을 차단하는 추상 회화처럼 뵈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의 글은,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평면의 물리적 특성을 드러내고 강조하는, ‘행위로서의 그리기’가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벽화 제작 방식은, 전통적 회화의 지지체를 부정하고 세상 만물의 표면을 제 분사 회화의 장으로 삼아버린 카타리나 그로세의 메소드와 비교해봄직하다. (주름을 만든 캔버스에 물감을 분사한 뒤 스트레처에 당겨 고정함으로써, 물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환영적 비환영 회화를 도출해내는 토바 아워백의 메소드와 비교해봐도 좋겠다.)
물론, 최종 결과물로서의 벽화엔, 솔 르윗의 벽그림 연작을 연상케 하는 바가 없지 않다. 과정의 수립에 중점을 두고, 결과는 거의 자동적으로 도출되게 하는 수법 또한, 어느 정도는 솔 르윗에 빚을 지고 있다. 하지만, 특정 메소드를 취해 방식을 갱신하고, 해당 메소드과 주체 사이의 거리를 비평적으로 표지하는 감각이나 태도는, 새로운 것이다. 재창안된 메소드 자체가 작가 자신으로 간주되던 시대는 오래 전에 저물었으니까.
9. 물론, 작업의 과정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임의성이 완전히 통제되는 것은 아니다. 벽화의 제작에 사용된 색상, “다홍색, 연초록색, 어두운 갈색, 회색, 검은색”에 관해 작가는, “공교롭게도 얼룩덜룩한 전시장 바닥의 색깔과 닮”았다면서 개연성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사실 진심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색상의 선택에 숨은 맥락이 있을까? 잘 모르겠다. 사실 있어도 모르는 편이 더 여러모로 멋지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운보 김기창은, 전모가 드러나면 흉하다고, 뭐든 삐뚜름하게 봐야 멋있다고 그랬다. 그래서 나는 강의할 때 학생의 눈을 보지 않는다.)
10. 미술가 본인이 취하는 미디엄과 그를 다루는 방식 모두에 참조적 특정성을 부여하는 특징은, 사이아노타입으로 제작한 사진 연작에서 더 잘 드러난다. 포토그램의 일종이니까, 미술가라면, 누구나 만 레이나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사례를 떠올리게 되지만, 작가는 굳이 글을 통햐 발명자인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을 이야기하고, 식물학자 애나 앳킨스가 사이아노타입을 활용해 식물학 기록지를 구축한 점을 강조했다. 이는 작가가 활용하는 미디엄이 단지 물리적 미디엄이 아니라, 담론적 차원에서 전유된 미디엄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비고: 전후 추상화가들이 재료에 특정성을 부여하는 방식은, 현상학적 물성에 특정성을 부여하는 단계에서 출발해, 지지체의 장소적 성격에 특정성을 부여하는 단계를 거쳐, 지지체와 물감과 붓질 행위의 담론적 성격에 특정성을 부여하는 단계로 심화-발전했더랬다.)
11. 한데, 작가는 포토그램의 특징과 매력을 이렇게 해석했다: “사진과 비사진적 이미지 사이의 경계선에 서 있는 듯한 매체다. 결과물로 보자면 회화나 드로잉, 판화, 혹은 인쇄물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포토그램에 내재된 표현 가능성은 단순하며 제한적이지만, 그만큼 우연의 결과를 얻어낼 가능성도 커 보인다.” 이는 다소 기만적 언술처럼 들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결국 그의 사진 작업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우연성의 통제’와 ‘결과의 취사선택’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진 작업들은, 기각된 B컷/프린트들과 무연을 주장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닌다.
12. “역사적으로 이미 성취해낸 형식적, 내용적 실험은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도 했으니, 참조적 전유를 통해 구식 미디엄을 재활용했지만, 그것이 어떤 역사적 실험의 재방문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자연을 독해하는 방식과 태도는, 여러 면에서, 바우하우스나 울름조형대학의 기초 과정에서 제시됐던 그것을 연상케 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내 입장에선, 자연의 질서를 수집하고 정련해 추상을 도출해내는 숙제라고 하면, 일단 지긋지긋하다는 감상이 앞선다. 지금이야 그런 과제가 자연의 추상을 추구했던 칸딘스키의 사상을 각 미디엄으로 반복 훈련하는 뜻에서 고안됐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학창 시절에 아무런 설명 없이 특정 태도를 정답으로 강요하는 교수들을 보면, 그저 거부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포토그램 과제에서 성적을 잘 받으려면, 자연으로부터 추상성을 찾아내거나 기능적 공업 사물로부터 추상성을 찾아내야 했는데, 그런 요구에 부합하기 싫었던 나는, 굳이 미적으로 우수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버내큘러 오브제들로 포토그램을 제작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받은 성적도 예상한 대로였다.)
작가의 글에서 ‘구체적 대상을 각도와 배율을 달리해볼 때 추상이 된다.’는 이야기를 읽을 때도, 역시 다소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사이아노타입 연작을 통해, 자연의 추상과, 자연을 모방한 버내큘러 추상을 의태하는 추상과, 기본 단위의 반복을 통해 대상성을 뛰어 넘는 추상과, 대상을 분해해 대상으로부터 어떤 시적 성격만을 추출해내는 추상 등을 골고루 시연해 보였다. 하지만, 모두 어제의 추상을 방법 차원에서 의태하는 것이니, 결과물을 독해하는 관객 입장에선, 다소 맥이 빠진다. 그라면, 오늘의 시점에서 유효한 추상을 실험할 수도 있을 텐데. (물론, 그러자면, 매체에 얽매이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13. 따라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작업은, 수채화 엽서 연작이었다. 상상적인 암호를 망상하고, 암호가 주체가 돼 상상을 유인 혹은 교란하는 상황을 망상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가의 글도 재밌었다. 하지만, 어쨌든 최선아의 작업은 장막을 장치해 미지의 영역이나 접근이 제한되는 정보로 사람을 꾀는 부류가 아니다. 대개의 경우, 다차원적으로 자명해서 좀 썰렁하거나 다소 어색한 느낌이 들 정도다. (외로운 관객들이 감정이입할 ‘뽕점’ 같은 걸 장치해놓으면, OOO 작가처럼 돈도 많이 벌고, 훨씬 더 살기 편할 텐데.) 한데, 엽서 연작에선, 색채 심리학의 논리 체제를 전유해 감상적인 색채 구성을 민망함 없이 활용하고, 또 그것을 단순히 종이의 크기를 이등분 삼등분 사등분한 구성에 감성적인 필치로 해석될 수 있도록 적용해놓았기 때문에, 여타 작업과는 사뭇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노골적으로 (서정)시적이랄까? 게다가 해당 그림들은 엽서가 돼 직접 먼 길을 여행해 서울에 도착했다. 멜랑콜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글 _ 이정우(임근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