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2014-2016 프로젝트 7 1/2

우리는 디지털 미디어와 기술의 발달로 정보가 넘쳐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점점 절대 진리에 대한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 절대 진리는 A 또는 B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A above B’이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마음대로 해석하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상대주의, 다원주의, 개인주의 등을 포용하며 이 세상은 ‘절대 진리’를 놓치고 있다.

 

인간은 자기 주위에서 대상들을 인지하자 마자 그것들을 자기 자신과 관련 지어 관찰한다.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운명 전체는 그 대상들이 그의 마음에 드는지 그 대상들이 그의 흥미를 유발하는지 그리고 그 대상들이 그에게 유익한지 아닌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사물들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방법은 당연하리만큼 손쉬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은 이 방법에서 수천 가지 범하기 쉬운 오류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 오류들은 종종 인간을 부끄럽게 만들고 또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괴테, 색채론, 민음사, 313쪽)

 

예술을 단순히 미(美)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에게 예술 작품과 상품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예술을 즉흥적이고 기발한 생각의 발상 정도로 여기며 그것을 개념미술이라 일컫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마지막으로 예술 작품을 소장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무엇을 위해 작품을 소장하는가에 대해.

암구명촉(暗衢明燭)과도 같이 예술 작품에 담긴 메시지는 미세한 불빛으로 현실을 비춘다. 그리고 그 미세한 불빛을 감각하는 이들은 생각하게 된다. 예술의 공명과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해. 나는 예술은 끊임없이 삶의 진리에 대해 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우리 삶 속에 공존함을 넘어서 공명을 만들어낼 때 비로소 가치를 발할 수 있으며 그것이 예술이 갖는 특권일 것이다.

 

7 1/2 프로젝트

 

7 1/2 프로젝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원론적인 이 질문을 7½ 프로젝트를 통해 던지는 이유는 정답을 찾고자 함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술을 지향하며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7 1/2 프로젝트를 통해 생각해 보고 반추해 보고자 함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예술 작품에 내재한 논리나 물성으로 드러나는 작품의 형태보다 더 강함을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모호해 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던 ‘예술가 상(想)’이 사라지고 구분 또한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이다. 나는 예술을 특정 계층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구분 지어 말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예술과 비예술에 대한 구분이 모호해지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예술의 가치가 생성되고 평가되는 것에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7 1/2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과 비예술에 대한 경계, 그리고 예술이 지역과 사회에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기능하는지 탐구해 보기로 했다. 예술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또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동시에 사라짐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간혹 예술 작업을 통해 전혀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은 순수한 미적 경험으로서, 앞선 좌표를 갖지 않은 무방비한 상태에서도 가능한 성질의 것이다. 낯선 공간에서 언어로 포획되지 않는 이러한 감각의 상태는 예술적인 그 무엇으로 우리와 마주하게 될 때 섬광처럼 빛난다. 그러나 그 발견의 순수한 즐거움은 확립된 담론이나 시장 가치 논리에 어김없이 손상되고 만다. 즉, 예술을 지식과 제도의 영역 속에서 먼저 해석하고 위치시키는 순간 다가왔던 감각들을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가끔 순수한 예술적 감각의 즐거움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그 감각들을 어떻게 살리고 또 회복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도출하게 되었고, 이 질문에서부터 7 1/2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7 1/2 프로젝트는 예술 작업을 통해 전해지는 ‘감각’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중 감각적으로 취해질 수 있는 예술 경험의 ‘관점의 문제’ 에 주목한다. 미학적인 해석을 끌어내기 위함 이기보다 사회학적인 접근에서 나와 타자와의 관계,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에 대해 기존 관점을 비평하고 새로 도입된 관점이 부딪혀 들어가서 ‘ 관점 이동’을 촉발하고자 시도했다. 즉, 인지 단계 이전, 혹은 미적인 인식의 단계 이전의 감각과 직관의 단계에 내려질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을 만들어 내는 예술 작업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 감각들이 자본주의 사회 혹은 예술의 제도 안에서 어떻게 번져 나가며, 어떤 형태의 예술로서 공존하게 되는지에 대해 탐구하고자 한다. 즉, 7 1/2 프로젝트는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미묘한 ‘ 감각들’을 집약하고, 예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다양한 관점을 찾고 또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관점은 담론과 지식으로 쉽게 소비되지 않는 예술의 실험적 결합으로 감각화되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참여 작가와 작품 그리고 장소 선정 나는 십여 년 넘게 국내 외 미술계 중심에서 활동하는 유명 작가들과 함께 일을 해 왔다. 정말 인상 깊었던 좋은 작가들과의 경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작가들과의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미술계라는 구조 안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예술을 지향하며 벌어지는 여러 상황 속에서 발견되는 모순들을 발견하면서 이해되지 않아 여러 번 곱씹어 상황을 반추했다. 이런 과정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 매번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도대체 예술이 무엇인데?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여러 세대를 거쳐도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 이 상황에 대해 생각했고, 7 1/2 프로젝트를 통해 이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탐구해 보기로 결정했다. 7 1/2 프로젝트의 시작은 미술계 중심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내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과 자연스럽게 네트워킹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예술과 무의식’이라는 주제로 김남수 선생의 강연을 기획하였다. 기획 의도에 맞게 강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나지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관심사와 작업을 살펴볼 수 있었다. 모두 강연을 계기로 처음 만나게 된 작가들이었고, 이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공통의 관심사를 끌어냈다. 이런 과정을 통해 2014년과 2015년 참여 작가들을 선정했다. 김태욱, 김숙현, 배서영, 이지연, 장홍석, 강진안, 김승록, 류성국, 강말금, 이현수, 이록현, 홍상현, 하상철 작가가 이에 해당한다. 이와는 다르게 2016년도에는 ‘암호적 상상’이라는 주제가 있었고, 이 주제를 통해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했다. 이에 맞는 프로젝트 진행 장소 선정이 중요했고 여러 고심 끝에 2015년 문래동에 이어 2016년에는 종로3가 장사동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다음 전시 주제와 장소에 맞는 작가 선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2016 년 7 1/2: 암호적 상상은 배서영, 이현지, 故성찬경+성기완, 제네브 추아, 슬기와 민 그리고 최선아 작가의 전시로 이어졌다. 7 1/2 프로젝트는 기획이 중심이 된 예술가들의 결합 형태로서 장르적 규범을 해소하고 또 방법론들을 공유하여 확장된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7 1/2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작가의 작업은 프로젝트의 기획 의도와 진행되는 장소, 그리고 주제에 맞게 새로 제작되어야 했기에 작가가 제안한 작업이 장소에 맞춰 어떻게 구현되는 가는 작품을 설치하는 과정과 완성된 후에야 완벽히 드러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미묘한 감각들 또한 큐레이터와 작가 모두에게 흥미로운 점이 되었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3년 동안 7 1/2 프로젝트는 비어 있거나 기능하지 않는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전시가 진행된 공간들은 화이트 큐브의 갤러리가 아닌 작품을 기능하게 하는 오브제로서 역할을 했다. 첫해 2014년에는 예술을 지향하나 명확한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공간을 유랑하며 강연과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2015 년에는 많은 예술가의 작업실이 밀집되어 있고,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도시재생프로젝트가 활성화되고 있는 문래동 지역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2016 년에는 장사동을 선택하였다. 문래동과 장사동 모두 한국의 60–70 년대 산업화를 끌어낸 곳이다. 하지만 두 곳 모두 현재 낙후된 도심 지역으로 이전의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있으며, 재개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문래동은 여전히 직접적인 노동이라는 행위가 드러나는 곳이고, 장사동은 생산된 제품을 판매 유통하는 장소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7 1/2 프로젝트는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문래동을, 작품과 상품의 차이 즉,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을 탐구하기 위해 장사동을 장소로 선택했다. 7 1/2 프로젝트는 주어진 공간과 시간 안에서 느슨하게 펼쳐지고 또 연결되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이 7 1/2 프로젝트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 예술 작품을 감각하는 것에 대해 나는 철학을 비롯해 모든 담론은 사건을 언어의 틀 내에 한정시키려는 노력이고, 그 사건의 무한성(만남의, 관계의 무한성)을 변질시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이성적 사유가 의식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언어와 작품을 통해 감각했던 것 사이에 어긋나 짐을 느끼게 되는 불편함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술 작품을 보기 전에 그것에 대한 해석을 읽지 않으려 노력한다. 예술 작품을 보고 감각했던 것들을 가능한 한 오래 간직하고자 텍스트와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인데 정말 드물게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면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관계의 무한성이 내 고정 관념의 틀을 깨거나 기존의 관점을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이동시키고 이해의 폭을 확장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주관적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7 1/2 프로젝트를 통해 예술을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 감각하는 것들에 대하여 즉, 예술과 비예술의 간극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고, 그것을 이 프로젝트를 보는 이들에게 첫 번째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전시공간에는 그 어떤 설명의 텍스트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불편을 토로하는 관객들이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는데, 많이 배우고 평상시 예술을 많이 접했던 사람일수록 작가의 의도, 작품의 의미를 글로 읽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관객들에게는 구두로 설명하기도 했다. 이들의 특징은 스스로 느끼고 그것을 언어를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고, 작품을 보고 사유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고, 작품에 정해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기본 정보 전달을 위해 전시공간이 아닌 웹사이트나 SNS와 같은 기본적인 홍보물을 통해서만 최소한의 설명을 했다. 본 자료집이나 도록은 기록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무엇과 무엇의 사이, 7 1/2

무엇과 무엇의 ‘사이’를 뜻하는 ‘7½’은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 (1999)에 등장하는 7층과 8층 사이, 7½(칠과 이 분의 일) 층에서 차용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체험할 수 있는 연결 통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 굴과 같이 예술(타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토끼 굴속으로 빠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프로젝트 제목을 7½이라고 정했다. 예술과 무의식, 예술과 비예술, 나와 타자와의 관계 등 무엇과 무엇 사이, 우리가 예술을 지향하며 인지하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7 1/2 프로젝트는 우리의 삶, 현실 속으로 들어가 유발하는 모든 과정을 탐구하고 기록한다.

 

7 1/2 프로젝트 들어가기

이처럼 7 1/2 프로젝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동시에 사물 혹은 사건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찾으면 세계를 보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모든 분야가 그러하겠지만, 예술의 장르들도 자신만의 관점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예기치 못한 만남과 충돌, 조화를 통해 제3의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이제는 미디어와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의식과 감각의 전 지구적 소통과 교류가 일상의 차원에서 가능해졌다. 그래서일까, 느끼는 것들을 판단하는 인간의 능력이 무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미디어와 통신 기술의 발달로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지기도 했다. 이를 현실 자체가 이상한 나라가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예술은 아직 이 이상한 나라의 입구에서 망설이고 있다. 이런 설정을 한번 해 보자. 예술을 ‘이상한 나라’라고 하고, 관객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설정하는 것이다. ‘ 이상한 나라(예술)’에서는 그 나름의 논리와 방식이 있고, 그 나라에 사는 인물들의 논리에 의해 ‘ 앨리스(관객들)’는 다스려진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나라 사람들의 행동을 예견할 수가 없다. 이는, 앨리스의 입장에서는 예측 불허한 독재적인 지배를 받는 것과도 같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 안에서 이들의 법칙을 따라야만 한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피지배자로서 괴로워하기보다는 이상한 나라에서 환상적인 모험을 즐길 수도, 혹은 즐기지 못할 수도 있다.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 속 등장인물들의 논리의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즐거운 요소들을 찾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런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 속 상황에 잘 적응해 가는 유쾌하면서도 모험을 즐기는 도전적인 혹은 진보적인 이상적인 이상한 나라 속 주인공의 모습으로 여기게 된다. 다시 말해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규칙을 준수하면서 그 안에서 유희를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상황을 7 1/2 프로젝트를 통해 연출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규칙 복종과 유희가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놀이로 해석하고 7 1/2 프로젝트에 ‘놀이’의 개념을 적용하게 되었다. 7 1/2 프로젝트에서의 놀이에는 동시대가 갖는 사회적, 문화적 배경 속 이야기들이 참여 작가들의 작품 속에 절묘하게 반영되어 보인다. 잠시 7 1/2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 속의 모든 사건이 단지 놀이의 일부라고 가정해 보자. 이 프로젝트가 두 명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놀이이라고 했을 때, 관객은 7 1/2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장소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놀이의 참여자가 된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장소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즉 자신의 몸이 인지하는 감각이 다른 감각을 일깨우는 과정에 최대한 집중해야 하고 이것이 이 놀이의 방식이다. 2014년부터 2016 년까지 3 년 동안 펼쳐진 7 1/2 프로젝트는 각각 독립된 전시나 공연이 아닌 하나의 탐구 과정의 이야기로 연결되며,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탐구 과정에서 드러났던 미묘한 감각적 이야기들은 연구 결과로 드러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