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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문화적 보편주의'에 반하여

현 미술계에서 ‘국제교류’ 전시는 더 흥미를 끌지 못한다.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거대 국제전들이 거의 유사한 작업들과 작가들의 레퍼토리로 점령된 지도 이제 꽤 되었다. 때문에 2017년 아르코미술관(‘우수전시’로 선정됨), 2018년 3월 ‘김해문화의전당,’ 9-10월 ‘인도네시아 국립갤러리’와 마지막으로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을 순회하면서 개최된 일련의 전시에 주목하고자 한다. 프로젝트 7 1/2의 국제전은 기획자 오선영이 지난 2년간 한국과 인도네시아 작가들과 소통해온 결실이다. 특히 전시에 포함된 인도네시아의 빌리지 비디오페스티벌은 경제적인 기반이 피폐화된 자티왕이 지역에서 지난 10여년 간 지역민들과 동고동락해왔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 국제교류의 옳은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그런데도 전시 서문에서 큐레이터가 우려를 표시한 바와 같이, 관객 참여적이며 노마딕한 전시기획이 얼마만큼 소외된 이들의 역사를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객에게 알려주고 사회적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서울, 김해, 자카르타에 걸쳐서 열린 프로젝트 7 1/2의 전시들을 보면서 필자는 작업 자체보다는 작가와 현지인과의 협업 관계나 같은 작업이 전시되는 서로 다른 사회적인 배경에 집중하고자 한다.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가 열린 김해와 유사하게 인도네시아의 자티왕이는 전통적인 기와 산업의 본산지이자 식민지 시대 토지 수탈이 자행된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을 되살리고자 믹스라이스는 ‘인도네시아 국립갤러리’의 전시 준비를 위해 1달 동안 자티왕이에 거주하면서 지역민들과 워크숍을 진행했다. 전시장 입구에는 한국의 전통민요를 인도네시아 음악가가 편곡해 자티왕이 지역민들과 다 함께 부르는 영상이 등장한다. 노래 속에 공통된 삶의 애환을 암시하고 있는 믹스라이스의 <고사리>는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려는 휴머니즘의 긍정적인 예에 해당할 것이다. 최선아는 <직조된 무늬>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각국 문양들 사이의 공통점을 추출해서 ‘보편적(Universal)’인 문양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믹스라이스의 전문성이나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인들과 한국 작가의 ‘동거’가 편치만은 않아 보인다. 인도네시아 현지인들과 한국 작가의 관계는 과연 어떠했을까? 참여한 현지인이나 관객에게 이 프로젝트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필자에게는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식민지 역사가 지닌 공통점보다 다른 점이 더 눈에 띄었다. ‘자카르타 역사 박물관’은 18세기부터 1913년까지 인도네시아를 지배한 네덜란드 정부의 시청사였고 박물관 뒤편 지하에는 여성 죄수들을 가두던 공간이, 그리고 같은 뒤편의 한가운데에는 전쟁의 여신인 헤르메스 동상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박물관은 식민지 역사를 인도네시아 근대화의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네덜란드 상인들이 남긴 화폐나 가구와 함께 혼혈민족의 이야기를 간단히 전시한다. 자카르타 역사박물관의 프로젝트 7 1/2 전시는 이러한 역사적 재현의 과정에서 사라진 피식민자들의 삶과 이야기에 집중한다. (오선영 기획자는 2019년 인도네시아 역사학자들과 20세기 이후 자카르타의 역사를 다시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베리부 부닥>에서 이르완 아흐멧과 티타 살리나는 인도네시아의 공식적인 역사나 박물관에서는 자취를 감춘 인도네시아 노예들의 모습을 길거리 작가들이 재현하도록 하고 패널에 붙여서 역사박물관 곳곳에 설치해 놓았다. ‘베리부 부닥’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식민지 시대에 각종 허드렛일을 담당한 인도네시아인 노예들이다. 송상희의 <거기, 너와 나>도 일제강점기 한국 경성의 엽서와 인도네시아에 있던 네덜란드인들이 만든 엽서 속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킨다. 엽서 속 대부분의 이미지는 통치자들이 즐겨 찾던 식민지의 관광명소들이다. 이 작업은 식민지 시대와 근대화 시대의 역사를 자연스러운 연장선상으로 이해했던 인도네시아의 일반 관객들이 자신의 환경과 역사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서울, 김해, 자카르타 역사를 아우른 7 1/2의 프로젝트는 진정한 국제 교류를 꿈꾸는 ‘착한’ 의도와 문화적 차이나 괴리에 의해 생겨난 다양한 시선들이 충돌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필자만 하더라도 아흐멧과 살리나가 안산 이주노동자들의 다친 손을 확대해서 꽃의 이미지로 만든 <통화>(2017)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같은 작업이 서울과 김해, 그리고 인도네시아 국립 갤러리에 전시되었는데 볼 때마다 다른 인상을 받았다. 국립갤러리에서는 한국 내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이미지에 대한 인도네시아인의 반응이 궁금해졌고 무엇보다도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이주노동자의 이미지를 접했을 때 더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주 노동자들도 이들 관객 누군가의 가족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두 도시의 이야기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프로젝트 7 1/2의 노마딕한 국제전은 무엇보다도 전지구화 한 미술계에서 인위적으로 조장되어온 ‘문화적 보편주의’를 재고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글로벌한 미술계에서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등의 각종 분류가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국제전이 일상화된 현대미술계가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도시의 이야기: ‘문화적 보편주의’에 반하여]

고동연 (미술사학자/평론)

월간미술 2019년 1월호/수정 2020년 1월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