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2015년 6월 20일 – 7월 18일
오픈: 기간 중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 5시
장소: 서울 영등포구 도림로 128가길 1
올해 <7 1/2 프로젝트>의 두 번째 프로젝트의 제목인 ‘수분(受粉)’은 매개자를 의미한다. 이 글은 첫 번째 프로젝트 《기능적인 불협화음》에서 두 번째 프로젝트 《수분(受粉)》으로 연결되는 과정과 경험을 기록한 서술 방식을 취한다.
오선영 (큐레이터) 2015년 3월 ~ 5월, 문래동 3가 54번지
문래동 철공소 아저씨들을 포함하여 올해 <7 1/2 프로젝트>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기능적인 불협화음》개막 행사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3월 13일 첫 번째 투어를 하면서 느낀 불편한 기운들이 나에게도 온전히 전달이 되어 한동안 그 불편한 기운을 소화해 내느라 적지 않게 힘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기능적인 불협화음》을 기획하면서 (《기능적인 불협화음》기획 의도나 배경에 대한 설명은 웹사이트 내용을 참고해 주길 바란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불협화음들, 마찰들에 대해 분명 예상했고 함께 기능하기 위해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기에 불편한 상황들을 모두 잘 중재하고 수용해보겠다 다짐했었다. 프로젝트에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프로젝트가 지니는 이러한 성격을 사전에 설명했고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서로 타협 가능한 지점을 찾았다. 내가 느끼기에 이것은 크게 거슬리거나 불편하지 않은 범위의 불협화음 정도였다. 그러나 투어이자 영화 스크립트 장면을 실제로 연출하며 발생했던 예상치 않았던 일, 즉 철공소 아저씨들의 갑작스런 출현은 이 프로젝트의 기능적인 불협화음을 완벽히 극대화시켰다. 투어의, 동시에 영화 스크립트의 클라이맥스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불협화음 사건 이후 며칠 동안 나는 문래동에 갈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과연 잘 진행할 수 있을까, 문래동이라는 곳을 올해의 <7 1/2 프로젝트> 개최 장소로 정한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일까, 많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조금 회의적이기도 했고, 막막하기도 했다. 마침내 이 상황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내 마음과 생각이 타협한 결과는 ‘전시 기간 중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로 관람 시간을 정하고, 나는 그 시간에만 문래동에 머물면서 주변을 관찰하겠다.’였다. 그렇게 타협안을 실행하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그날도 나는 지하에 위치한 전시장에 머물고 있었다. 김숙현 감독과 윤주영 조연출도 함께 있었는데, 우리는 지하가 너무 추우니 따뜻한 봄 햇살을 쏘이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내가 앞장서서 지하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좁은 계단을 오르는데, 우연히도 같은 건물 2층을 쓰고 있는 만호 아저씨를 마주쳤다. 나와 만호 아저씨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만호 아저씨는 밖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으니 와서 같이 먹으라고 권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는 이들과 밥을 먹는 것, 그것도 철가루와 먼지가 날리는 철공소 골목길 중간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이 상황이 반갑게 느껴졌고, 나는 이내 그의 호의에 응했다. 그래서 나와 김감독, 윤조연출은 철공소 아저씨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삼겹살을 굽는 자리에 가서 만호 아저씨는 다른 분들께 나를 ‘새로 지하에 이사온 20대 아가씨’라고 소개했다.(웃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내가 그날 그 자리에 간 것은 잘한 일이었다. 내가 이곳에 새로 이사온 사람이라고 제대로 인사함으로써 그날 이후 오가며 편하게 인사하는 사이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게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삼겹살을 구워 먹는 순간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하면, 새로 이사온 이웃으로서 내 소개를 하고 함께 삼겹살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대륙공업사’ 사장님이 간판 글씨를 새로 쓰고 싶다며 이런 것도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번에 “그럼 제가 써 드릴께요.” 라는 답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고, 거기서부터 문래동에서의 2015년 <7 1/2 프로젝트>의 두 번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순수한 시각에서-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 시각은 문래동 철공소 단지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경험이 없어 선입견을 갖고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문래동 철공소 지역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그 과정에서 감각하는 그대로를 작품에 담을 수 있는 작가를 찾았다. 그러던 중 배서영 작가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녀의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 너무나 즉흥적으로 한달 정도 문래동에서 작업실로 전시 공간을 쓰면서 이 지역을 관찰하고, 작업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즉흥적인 모험을 즐긴다!) 구체적으로는 대륙공업사 간판과 벽화 작업을 시작으로 탐구를 해 보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결국 대륙공업사 간판 작업과 <7 1/2 프로젝트>는 배서영 작가를 통해 연결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륙공업사를 통해 <7 1/2 프로젝트>와 배서영 작가가 문래동 철공소 단지와 연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후로 나는 배서영 작가를 통해 문래동 철공소 단지에 공존하는 이들과 함께 소통하는 과정을 탐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을 함께 경험했다. 최소한 그 순간에는 주변에 웃음이 있었고, 모두 행복해 보였다. 우리가 그 장소에 개입되면서 주변은 분명 변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최 사장님: 예술가들이 왜 문래동으로 들어오는 건가요?
– 염 작가: 월세가 싸니까 그렇죠.
– 박 아저씨: 문래동 철공소 건물 2, 3층이 비어있어야 하는데, 계속 예술가들이 들어오니까 건물 주인들이 월세를 계속 올려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월세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져요.
배서영(작가) / 2015년 5월~6월, 문래동 3가 54번지
재작년 겨울, 누군가 전시를 한다기에 문래동 철공단지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당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에게 문래동은 생소한 지역이었지만 적어도 철공소의 일상이 견고한 형태의 문화로 자리 잡혀 있는 곳임은 알 수 있었다. 또한 철공소와 철공소 사이, 간간히 걸려있는 철문 위의 전시 포스터나 좁은 골목길의 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통해 예술가(이주민)들이 이곳에 공존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올 봄, 나는 오선영 큐레이터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가 기획하는 <7 1/2 프로젝트>에 참여 제안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나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문래동을 다시 찾게 되었다.‘감각’이 궁극적 주제가 되어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올해의 <7 1/2 프로젝트>는 《기능적 불협화음》을 시작으로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관계적 괴리 현상을 짚어보고 있었다. 프로젝트 맥락상 지역적 공존과 공생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에 나는 이 지역의 문화를 가늠할 수도 없는 ‘외부인’일 뿐 어디서부터 작업을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였다. 그러던 중 큐레이터로부터 문래동 철공소 단지 내에 있는‘대륙공업사’간판과 벽화 작업부터 시작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이렇게 시작된 문래동에서의 작은 분주함은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였다. 대륙공업사 사장님을 통하여 음악교실 ‘만호 사장님’을 알게 되었고, 장미꽃을 그려달라는 옆집 철공소 사장님, 막걸리를 들고 다니시는 ‘동진 아저씨’등 나에게 말을 거는 이들이 많아졌고, 이러한 상호간의 관계를 시작으로 나는 철공단지 내에 형성된 문화를 어깨너머로 관찰할 수 있었다. 공존이 아닌 공생, 그것이 문래동이 좇는 삶의 문화였다. 이곳에서는 유토피아를 갈망하지 않았다.
사실 작가는 문래동에서 공생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급주택화나 상권 재개발에 촉매 역할을 톡톡히 하는 매개체이자 원-주민에게 도움을 받는 이주민일 뿐이다. 그런 이주민이 원-주민을 공생의 대상으로 이름 짓고 이미 형성된 원-주민의 견고한 문화에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얼마만큼의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지 반추해 보게 된다. 고목나무에 피는 꽃처럼, 문래동과 작가의 접붙임이 유기적 창출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배서영은 전자기기 문명에 잠식된 현대사회를 반추하며, 작업을 통한 감각기관의 회생을 바란다. 사회는 독립된 분자들이 모여 하나의 세포를 형성하고 포화 및 균열에 의한 해체 그리고 또 다른 형태로의 결합을 이루는 순환의 영속적인 반복이라 생각하며, 삶의 유기적 구조에 집중한다.
배서영은 뉴욕대학교에서 조형예술과 학사(2013) 학위를 받았다. 2015 영은미술관 입주작가로 선정되었으며, 2014 경기창작센터 레시던시 프로그램 및 입주작가 상반기 기획 개인전 <해석의 재해석>(경기창작센터, 안산, 2014)에 참여하였다. <발견>(아트센터피플러스, 서울, 2014), <초유체를 품다>(커먼스갤러리, 뉴욕, 2013), <상징과 징후 사이>(뉴욕대학교 조형예술과, 뉴욕, 2011), <7인 7색>(한국예술종합대학교 조형예술원, 서울, 2010) 등 국내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하였다. 재감자 자녀보호소 ‘Children of Promise’에서 <벽화 프로젝트>(뉴욕, 2012)를 기획하였으며, 경기창작센터에서 공간 기획 프로젝트 <共:作>(안산, 2013)을 공동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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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노트> – 2015년 8월, 배서영
습하고 환기도 되지 않던 지하의 작업장으로 가는 길. 문래역 7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왼편에는 익숙한 풍경의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낮은 높이의 철공소는 맞은 편 줄이어 자리한다. 한 달 여간의 여정은 문래동이라는 지역성을 다루는 문제로부터 출발하였다. 하지만, 삶의 ‘관계’라는 것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적 문제가 크게 다가왔기에 작가라는 직함을 단 표류된 이방인은 관계적 이질감을 해소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문래동에서의 작업과정은 기존에 내가 해오던 방식과 조금 다른 전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지역성을 수반하는 프로젝트의 참여작가였기에 외부와의 직접적 관계를 형성하며 과정을 이끌어나가는 작업 태도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래동에서 작업을 진행하던 한 달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운이 좋게도, 벽화작업을 진행하며 안면을 익혔던 철공소 사장님들이 제법 관심을 가져주셨고 이러한 왕래는 익숙해진 관계로 안착되었다. 간간히 작업하는 지하실로 내려오셔서 익살스럽게 ‘뭐 이런 것도 작업이라고 한다고’ 라며 잔뜩 핀잔을 주시다가도, 철판을 사러 돈을 들고 가면 귀한 돈일텐데 정말 고맙다고 하신다. 평소보다 느즈막히 작업하러 나타나면 길 어디선가 집에나 가지 늦은 시간에 무엇 하러 나왔냐며 한마디씩 던지기도 하시고, 오다가다 인사를 드리면 일을 하시다가도 ‘어이!’ 라며 반갑게 웃으면서 답해주신다. 이렇듯, 나는 사장님들과 지내는 시간이 쌓일 수록 인간적 유대관계의 형성을 느꼈다. 도시의 소음 사이로 들리는 투박한 듯 예리한 굉음이 낯설지 않을 때 즈음, 새삼 ‘관계’와 ‘노동’의 문제가 경종으로 다가왔다.
작업이 진행되던 중, 인터넷으로 문래동에 대해 찾아본 적이 있었다. 여러 기행문 형식의 글들이 시사하던 어구는 ‘노동자와 예술의 만남’ 이었다. 사실 인터넷에 기재된 것과는 달리 문래동 철공단지의 대다수가 임금 노동자라기보다는 본인의 공장을 가진 당업자 이다. 어쩌면,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파편화된 정보가 고착화됨으로써 특정 대상을 향한 제한적 시선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삶의 유형이 다른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매개체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공존하는 개념으로 다가오기 보다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문래동 철공단지의 다양한 개인을 집단 대상화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와 함께 쓰인 ‘예술’은 자칫 상대적 개념으로서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인간의 직관성이 전자기기와 매스미디어로부터 관여되는 현상에 불편함을 느낀다. 이것은 직접적 불쾌감이라기 보다 두려움에 가까운 것 같다. 나의 감각기관들을 하나씩 양도해주는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종종 얼리 어댑터가 되기보다는 최대한 외면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나의 행태들을 보고 누군가 이야기 했었다. “스마트 폰을 스마트하게 사용하지 못 하는 사람”이라고. 이 개인적인 두려움은 삶에 관계하는 것들이 이미지화된 파편으로서 표류되거나 혹은 그 파편자체가 삶을 대변하는 옹졸한 상황이 발생되는 것에 대한 본능적 반응일 것이다. 이렇게 표류된 이미지의 파편들은 무지각 상태를 만나게 되었을 때, 고착화되고는 한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사회와 삶의 관계에 선(線)을 긋는 현상이라 여겨진다. 시간성에도 관계를 위한 노동에도 좁혀지지 않을 형태로서의 이 선(線)은 우리의 인지 속에 잔존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좋은 취지의 명목이, 매스미디어로 인하여 의도치 않게 이미 형성된 문래동의 지역적 문화를 간과시키도록 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흥미롭게도 철판은 이러한 현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였다. 관계 사이로 그어진 선(線)과 같이, 철판의 견고한 형태는 아무도 밟지 못할 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철을 구성하는 입자는 워낙에 공기 중에 산화가 쉬운 성질이라 공정과정에서 부식을 방지하는 막을 두껍게 씌운다. 문래동에서 나의 노동은 이러한 표면을 그라인더로 벗겨내는 것이었고 철공단지 사장님들의 노동은 웰딩기로 꼼꼼히 이어 붙이는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작업과정은 정작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는 의도치 않게도 반대되는 행위, 일종의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협화음 안에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의 또 다른 화합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상반된 노동이 만나게 된 접점이, 정말 감사하게도, 나의 작업 도중 일어났다.
<문래동 3가 54번지>, 이 페인팅 꼴라주는 한 장의 길고 큰 철판을 자르고 붙이는 제작과정을 거치는데,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 물리적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마찰을 일으켜 긁어낸 철판의 표면에는 부식을 유발하는 재료를 만들어 나의 움직임을 남겼다. 붓이나 일정 거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걸레 혹은 장갑등을 사용하여 철판의 표면에 직접 맞닿기를 바랐다. 움직임이 거쳐간 견고한 철판은 이 곳 지하실의 습한 공기와 어우러져 동적인 변화과정을 가지게 되었다. 부식이라는 생동은 새로운 표면을 형성하였고, 이 산화된 철판은 봄에 만연하는 꽃가루와 같이 끊임없는 철가루를 생성하며 전시장 바닥에 흩뿌렸다. 또한, 철판이라는 매체의 특성은 자르고 붙이는 과정에서 전문적 기술을 필요로 하였다. 그리하여 철공소 사장님들께 조심스레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 작업은 마지막 벽에 거는 순간까지 협업의 형태로서 완성되었다. 특히, 대륙공업사 사장님께는 감사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나에겐 은인과 다름없는 분이었다.
이번 작업은 관계와 관계, 그 사이로 비교적 배려가 가능한 공존의 지점을 찾고자 함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문래동 철공단지에서의 한 달은 작업을 위한 고군분투였다기 보단 삶의 포용과 공존하는 방식을 배우게 된 시간이라 생각된다. 비록 한달 여간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수분受粉과 같이 나의 일상은 문래동으로 옮겨졌고 그 지역의 삶과 문화에 스며들 수 있어서 재미있는 노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수행할 노동이 삶과 어떠한 관계를 형성할 지 모르겠지만, 화합을 담은 불협화음으로서 사회 속에 표류할 수 있기를 바란다.